4.5F[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39〉

1 hour ago 2

아무도 나와 있지 않은 일요일의 건물이다 복도는 길고, 그 끝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다 주기적으로 빛을 내며 어둠 속에 서 있다 어둠 속에 버려진 모습으로 트리는 빛을 내다가 조용해진다 나는 저녁이 밤으로 건너가는 시간 동안 복도에 서 있어본 적이 있다 고개를 빼고 길게, 기울어져본 적이 있다 (중략) 나는 작은 책상에 앉아 바나나를 먹고 미온수를 마신다 아무도 내가 여기 사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말을 하지 않으니까 나는 말을 잊고, 내가 식물에 물을 주고 조용히 살아가니까 나는 아무렇게나 사용된다 이 건물은 방이 아주 많은 건물이다 일층부터 십층까지 창문이 아주 많은 건물이다 나는 내일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박상수(1974∼)


안에 있는데도 바깥에 머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둠 속에 버려진 모습으로” 복도 끝에 방치된 철 지난 크리스마스트리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세상에서 서성이는 자에게 복도는 길고 차갑다. 이때 복도는 통로가 아니라 기약도 없이 기다려야 하는 막막한 대기 장소가 된다. 화자는 건물 안에 있다. “일층부터 십층까지 창문이 아주 많은” 건물에서 그는 머물 곳이 없어 보인다. 4층도 5층도 아닌 4.5층에 존재한다. 식물에게 물을 주고, 미온수와 바나나를 먹으며 시간을 견디고, 최소한의 공간에 겨우 놓여 있다. “아무렇게나 사용”되고, “말을 잊”은 채 식물처럼 거처하는 그는 “내일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의 의지가 아닐 것이다. 마지막 문장인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예언이자 확언은 시인이 이 시에 뚫어놓은 작은 숨구멍 같다. 어디든 경계에 서본 자라면, 저녁에서 밤으로 건너가는 ‘4.5층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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