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걸린 소설 … 드디어 숙제 끝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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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걸린 소설 … 드디어 숙제 끝냈죠"

입력 : 2026.04.22 17:40

SF장편 '정전' 출간 함윤이 작가
산재사고 숨기려 하는 회사에
초능력으로 복수하는 이야기
책임감과 죄책감에 대한 탐구
제약공장서 일했던 경험 녹여

첫 장편소설 '정전'을 출간한 함윤이 소설가. 한주형 기자

첫 장편소설 '정전'을 출간한 함윤이 소설가. 한주형 기자

"무슨 재앙처럼, 전등도 기계도 죄다 꺼져서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고 허둥지둥하면 좋겠어. 다들 겁먹어 어쩔 줄 모르다가 그 표정 그대로 공장에서 달아나면 좋겠어."

대학 새내기인 스무살 '막'은 자신이 단기 계약직으로 일한 제약회사 공장을 멈춰 세우기로 한다. 동원되는 이는 고교 동창 친구이자, 눈을 한번 깜빡이면 전류를 끊어 놓을 수 있는 초능력자 '은단'이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기울어 돈을 벌어야 했던 '막'이 복수에 나선 동기는 공장의 부당한 처우였다. 직접적인 피해자는 자신이 아니었다. 사측으로부터 산재 은폐를 당한 스리랑카 출신 이주 노동자이자 막의 친구 '라히루'였다. 학비에 필요한 돈만 벌고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막은 사건을 직면하기로 한다. 회사에 어떤 피해를 끼칠지 모를 '정전'이라는 치기 어린 복수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첫 SF 장편소설 '정전'을 출간한 함윤이 작가(33)는 최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철없고 치기 어린 마음으로 누군가를 스스럼없이 돕겠다는 생각이 민폐를 끼치기도 하지만,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어른의 '책임감'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며 "SF소설이지만 사회초년생들의 이야기인 만큼 성장소설로도 느껴질 작품"이라고 말했다.

2022년 소설 '되돌아오는 곰'으로 등단한 그는 문단에서 주목을 받는 신예 작가중 한 사람이다. 2023년 젊은 작가상('자개장의 용도'), 2024년 문지문학상 대상('천사들')을 비롯해 지난해에는 '정전'으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했다. 올해엔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데뷔 이후 매년 주요 문학상에 이름을 올렸다.

'정전'은 사람 간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탐구해온 그의 작품 세계와 닿아 있다. 산재 사고를 당한 동료를 외면한 여공의 일탈을 다룬 '강가/ganga', 사정을 모른 채 흉악범 목숨을 구한 이의 죄의식을 그린 '나쁜 물'처럼, 그는 '정전'에서도 자신이 직접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에 죄책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주인공 '막'을 소환한다. 우정이라는 관계가 잇는 '연결감'은 올가미처럼 막을 옥죄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채찍이 되기도 한다. 막은 버둥대면서도, 산재 은폐 사건에 점점 발을 담근다. 철없이 맞서기에 세상은 거대하다는 걸 깨닫는 와중에도 가능한 일을 확인하며 한 뼘 더 성장한다.

"세계에서 터지는 전쟁을 보듯,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잖아요. 그 감정이 너무 과도하게 다가오면 외면해버리기도 하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무력해지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어느 곳의 구성원으로서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책임지려면 느낄 필요가 없는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긴 연결감이 오히려 사람들을 덜 무기력하게 해주지 않을까요."

'정전'은 작가 개인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소설의 아이디어가 직접 겪어낸 삶에서 나와서다. 그는 뉴질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2018년 현지 제약공장에서 일하며 작품을 썼다. 첫 번째 버전이 여러 문학상 공모에서 낙방하자, 2020년 노무사인 아버지 도움을 받아 취재를 보강한 뒤 초고를 갈아엎고 새로 썼다. 지난해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친 작품은 문학동네소설상의 주인공이 됐다. 등단 전부터 구상한 소설이 마침표를 찍는 데 꼬박 7년이 걸린 셈이다.

"공장에서의 시간이라는 실제 삶을 소설에 결합하길 바랐어요. 스스로 끝이라고 생각할 때까지 매듭지어보고 싶었죠. 오랫동안 붙들어왔던 숙제를 끝냈다는 느낌이에요."

등단 직후 단편과 장편을 오가며 매년 주요 문학상을 휩쓴 이력이 앞으로 집필에 부담이 되진 않을까. 그는 "의식된다"면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고갱이는 이야기에 대한 사랑이었다.

"최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 '사형수 탈출하다'를 봤는데 정말 좋은거예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느꼈어요. 이런 좋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고, 제가 만들 수도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요. 이야기가 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커다란 인생의 기쁨이에요. 집필하고 퇴고하는 과정은 되게 지난하지만, 즐거움이 더 큰 작업이 소설쓰기 아닌가 싶어요(웃음)."

[최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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