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매니저가 된 것이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김태우 하나자산운용 대표(59)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국내 최고의 스타 펀드매니저로 이름을 알린 그는 글로벌 자산운용사 피델리티에서 한국 대표를 맡아 해외 기관투자자들의 자금을 운용했고, 지금은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로 조직을 이끌고 있다.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은 몇 안 되는 한국인 펀드매니저다.
1989년 증시 버블(거품)과 붕괴, 1992년 깡통 계좌 사태, IMF 외환위기, 닷컴버블,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한국 자본시장의 굵직한 변곡점을 모두 현장에서 경험한 그는 시장을 전망할 때 지나치게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는다. 수십 년간 시장을 통과하며 얻은 결론은 단순하다. "시장은 늘 변하지만 좋은 기업이 성장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영화 한 편이 바꾼 인생
김태우가 투자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의외였다. 대학 시절 우연히 본 영화 '월스트리트(Wall Street)'였다. 영화 속 월가 사람들은 단순히 돈을 버는 이들이 아니었다. 기업과 산업의 미래를 읽고 자본을 배분하는 역할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자산운용 산업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펀드매니저라는 직업도 생소했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한국 자본시장도 선진화되고 한국 기업을 세계 투자자들에게 설명하는 전문가가 필요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 한국 증시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1989년 주가가 급등한 이후 버블이 붕괴했고, 1992년에는 과도한 신용거래가 '깡통 계좌' 사태로 이어졌다. 증권사 취업 문이 좁아지면서 그는 하나은행에 입행했다.
결과적으로는 이 경험이 투자관을 넓혀주는 계기가 됐다. 은행에서 자금 흐름과 리스크 관리를 배우며 시장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자본시장이 비로소 선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시장의 왜곡을 직접 경험한 덕분에 그의 투자 철학 중심에는 언제나 '리스크 관리'가 자리 잡게 됐다.
◆피델리티와 노르웨이 국부펀드
2000년 김태우는 미래에셋자산운용으로 자리를 옮기며 본격적인 펀드매니저 생활을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닷컴버블 붕괴 직후였다. 투자심리가 얼어붙은 시장에서 그가 맡은 상품은 개방형 주식형 상품인 '미래에셋 디스커버리 펀드'였다.
당시 국내 펀드 시장은 만기까지 환매가 어려운 폐쇄형 상품이 주류였다. 하지만 디스커버리 펀드는 장기투자를 전제로 한 새로운 형태의 상품이었다. 2001년 설정 이후 약 2년 반 동안 누적 수익률 153%를 기록하며 코스피를 110%포인트 이상 웃도는 성과를 냈다. 디스커버리 펀드는 국내 장기투자 문화 확산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김태우 역시 정상급 펀드매니저 반열에 올랐다.
2004년에는 글로벌 자산운용사 피델리티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그의 경력은 한 단계 더 도약했다. 글로벌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운용하던 한국 펀드를 맡아 운용 규모를 3000억원에서 1조원 수준으로 키웠고, 국내 투자자를 위한 대표 펀드 역시 1조원 규모 상품으로 성장시켰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을 전 세계 시장에 알린 것은 노르웨이 국부펀드(NBIM) 위탁운용이었다.
당시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한국 투자 확대를 검토하고 있었고, 그는 직접 프레젠테이션에 나서 한국 시장과 투자 전략을 설명했다. 처음 수천억 원 규모였던 위탁 자금은 이후 여러 차례 추가 배정을 거치며 약 20억달러 까지 늘어났다. 글로벌 기관투자자가 한국인 펀드매니저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성과였다.
김태우는 피델리티에서 10여 년을 보내며 세계적인 투자 거장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전설적인 성장주 투자자' 피터 린치에게서는 기업을 깊이 이해하는 법을, 영국의 스타 펀드매니저 앤서니 볼턴에게서는 독립적인 사고를, 가치투자의 대가 조엘 틸링해스트에게서는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을 배웠다.
그는 피델리티 시절 매년 300개 안팎의 기업을 직접 찾아다녔다. 지금도 그의 투자 원칙은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가는 기업 이익의 그림자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시장 심리에 흔들리지만 결국 기업의 가치를 따라가게 됩니다."
◆ 스타 펀드매니저에서 CEO로
2016년 김태우는 KTB자산운용(현 다올자산운용) 대표를 맡으며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펀드매니저와 최고경영자는 전혀 다른 역할이었다. 펀드매니저가 기업과 산업을 분석해 수익을 내는 사람이라면 CEO는 조직 전체가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자리다.
그는 "투자자는 시장을 보는 사람이고, CEO는 사람을 보는 사람"이라며 "자산운용사의 경쟁력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말했다.
KTB자산운용에서는 '글로벌 4차산업 1등주' '중국 1등주' 'ESG 1등주' 등 이른바 '1등주 펀드' 시리즈를 잇달아 성공시키며 회사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키웠다. 2023년 10월 하나자산운용 대표로 취임한 뒤에도 가장 먼저 손댄 것은 조직문화였다.
성과를 낸 직원에게는 그에 걸맞은 보상을 제공하고 우수한 운용 인력이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최고의 경쟁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KTB자산운용에서 함께 성과를 냈던 핵심 운용 인력들이 하나자산운용으로 합류했고, 업계에서는 그의 리더십과 조직문화에 대한 신뢰가 반영된 결과라는 평가가 나왔다.
조직이 바뀌자 성과도 뒤따랐다. 하나자산운용 ETF 수탁액은 취임 당시 약 3000억원에서 2년여 만에 4조원 수준으로 성장했다. 국내 주식형 액티브 펀드도 우수한 성과를 이어가며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 AI는 인터넷보다 큰 혁명
김태우가 향후 10년간 투자할 때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꼽은 것은 인공지능(AI)이다.
그는 AI를 단순한 기술 트렌드가 아니라 인터넷 등장에 버금가는 산업혁명으로 평가한다. 특히 그는 생성형 AI를 넘어 현실 세계와 결합하는 '피지컬 AI'에 주목한다. AI가 로봇과 공장, 물류, 자동차 등 제조 현장으로 확산되면 산업 구조 자체가 바뀔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은 반도체와 제조업, 배터리, 자동화 기술 등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만큼 AI 시대에도 충분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그는 전망했다.
장기 투자 유망 분야로는 바이오를 꼽았다. 과거에는 기대감만으로 기업 가치가 평가됐다면 이제는 실제 매출과 이익을 내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고, AI가 신약 개발 속도를 높이면서 산업 경쟁력도 한 단계 도약할 것으로 기대했다.
수십 년 동안 시장의 시험들을 통과한 그는 투자자들에게 시장 전망보다 기업에 집중하라고 강조했다. "투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게임이 아닙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시장을 이기려 하지 말고, 좋은 기업과 함께 성장하십시오."
※ '한국의 위대한 투자자' 시리즈는 한국 투자업계에 살아 있는 전설들의 인물 스토리와 투자 인사이트를 전합니다. 인터뷰 전문은 프리미엄 재테크 콘텐츠 플랫폼 '매경플러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최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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