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더 찾게 되는 애착 음식으로 평양냉면이 있다. 처음 접했을 때는 밍밍하고 슴슴한 맛에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아마 자극적인 음식에 입맛이 길든 탓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겨울이 되면 더 생각이 난다. 고깃집에서 달달한 양념 돼지갈비를 구워 물냉면 속에 담가 먹을 때도 있지만, 전문 냉면집에 가서 먹는 평양냉면 한 그릇은 늦게 입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음식이 되었다. 톡톡 끊어지는 메밀의 식감, 양지를 포함한 고명, 동치미 국물은 담백함을 넘어 시원하고 투명한 느낌을 준다. 자극이 없기에 사계절 내내 먹을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겨울에 더 잘 어울린다. 여럿이 가면 수육과 만두가 더해지는 이 한 상은 특히 겨울에 제격이다. 평양냉면은 결국 202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겨울이라도 좀 따뜻하다 싶은 날이면 가벼운 백팩을 메고 길을 걸어 보곤 한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다가 10km쯤 걷고 나면 어느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힘이 들면 길가의 카페에 들어가 잠시 쉬는데 끈끈한 땀과 살짝 얼얼한 다리 통증이 기분이 좋게 만든다. 그 상태로 평양냉면 집에 들러서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하루를 잘 보냈다는 기분이 든다.
양인모 바이올리니스트를 생각하다가 문득 이 평양냉면이 떠올랐다. 중독성 있는 평양냉면처럼 반복적으로 듣고 싶은 연주자랄까. 대학원 시절 동기 한 명이 그를 아느냐고 물었고, 자기가 그와 친척이라는 말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친척들 모임에서 이야기를 들은 듯한데 유명하냐고 재차 물어왔다. 당연히 연주 잘한다고 하니 본인이 몰라봤다는 사실에 웃던 동기. 사실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 시절 그의 연주를 통해 제대로 알게 되었고, 영재 시절 안경을 쓴 귀여운 모습의 사진을 뒤늦게 찾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멈춤 없이 자신의 선을 갱신해 왔다. 점점 더 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볼수록 좋아지는 연주는 더욱 인상적이다.
또한 그는 인터뷰도 맛깔나게 잘한다. 음악 외의 여러 질문에 답하는 표현력이 어찌나 좋은지 인터뷰어를 만족시키는 흔치 않는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만큼 책을 많이 읽기도 했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진지함과 깊이가 인상에 남는다. 작곡을 취미로 삼고, 매일 조금씩 창작을 이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세상에 나올 그의 음악을 기다리게 된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는 것. 설명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 양인모의 연주는 나에게 그런 평양냉면 같은 음악이다.
양인모는 1995년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났다. 적도 지역의 더운 날씨 아래 살아와서 그런지 그에게는 조급함이 없다. 그의 태도는 늘 안정적이고 미소 역시 차분하다. 어느 인터뷰에서 짧은 새끼손가락과 각진 엄지손가락을 갖고 있는 동시에 왼손이 길다고 말하며 그래도 파가니니 곡은 피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파가니니는 기술적 과시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연주자의 신체와 정신을 모두 시험하는 음악이다. 그 음악을 피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손의 구조보다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먼저라는 의미로 느껴진다. 그렇게 말했던 양인모는 결국 2015년 프레미오 파가니니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이후 ‘인모니니’(양인모+파가니니)라는 별칭까지 생겼다.
2022년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도 한국인으로는 최초 우승했으며, 현대작품 최고해석상도 아울러 수상하는 동시에 1743년산 과다니니 델 제수 ‘캐논’ 바이올린을 무상으로 대여받았다. 그 후 ‘요아힘 마’라고 불리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2년간 대여받았다. 브람스와 평생 벗이었던 요제프 요아힘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사용했던 악기이다. 후에 보스턴에서 만난 후원자가 대여해준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기도 한다. 2025년 30세 때 스트레턴 소사이어티로부터 1743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카로두스 Carrodus’를 대여받았는데, 이 악기는 약 2천만 달러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니콜로 파가니니가 소유했던 악기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다양하면서도 최고의 가치를 지닌 악기들만큼이나 양인모는 자신만의 폭 넓은 레퍼토리를 구사하며 최고의 실력을 보이고 있다.
양인모는 2008년 12살에 금호영재 콘서트 독주회로 처음 금호아트홀 무대에 올랐다. 그 후 10년만에 2018년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로 선정되었고, 다섯 차례에 걸친 상주음악가 프로그램에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연주로 초절정의 기교를 보여주었다. 이 곡은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 많은 작곡가를 매료시켜 저마다 그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쓰게 만들었을 만큼 매혹적이지만, 바이올리니스트에게는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난도를 지닌 곡으로 악명이 높다.
나의 예전 집 거실에는 바이올리니스트 미리암 프리드(Miriam Fried)가 리허설 중 웃으며 연주하는 대형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연주가 잘 되어서 짓는 웃음이 아니라 음악이 몸과 얼굴을 관류하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표정일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러나 분명히 전달되는 감정의 흔적이었다. 얼굴은 인간의 감정을 가장 빠르고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매개이다. 사진 속 미묘한 웃음, 살며시 감은 눈, 활을 켜는 순간 얼굴 근육의 긴장은 보는 이의 정서를 즉각적으로 자극한다. 이 표정은 설명이 필요없이 안정감과 친밀감, 그리고 음악과 감정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수많은 기획공연을 사진으로 기록해온 나에게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얼굴이 있다면 그것은 미리암 프리드의 사진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양인모가 2013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그녀를 사사했다고 한다.
양인모의 스승인 미리암 프리드는 1968년 파가니니 콩쿠르 1위, 197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1위를 차지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만난 아이작 스턴의 후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에서 이반 갈라미언을, 인디애나 음대에서 조셉 긴골드를 사사했다.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이유라, 이지혜, 김다미, 장유진, 이수빈, 양인모 역시 그녀의 제자들이다. 그녀의 교습 방식은 이른바 ‘미리암 메소드’로 불린다. 이는 연주 기술을 넘어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삶의 진정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르침이다. 양인모는 스승이 “연주의 이유를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사고일 뿐”이라고 말했던 순간을 회상한다. 그 말은 연주자에게 설명하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음악을 사유하도록 만드는 질문이었다고 한다. 이 사진 속에서 내가 느꼈던 얼굴의 표정은 그녀가 제자들에게 던졌던 질문의 태도와 닮아 있다. 음악은 그렇게 얼굴을 통해, 가르침을 통해, 다시 다음 세대로 건너갔나 보다. 그래서 양인모의 얼굴에도 연주를 대하는 스승의 태도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양인모의 연주는 보고 있노라면 잘한다는 느낌을 넘어서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나는 그를 어느 공연장에서 마주하든 매번 다시 인정하게 된다. 그의 연주에는 정체의 기미가 없다. 흔히 말하는 슬럼프의 흔적보다는 끊임없이 갱신되는 질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과거의 성취에 머무르지 않고 늘 현재형으로 존재한다. 한 번도 내려온 적 없는 상승 곡선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극을 덜어낸 평양냉면의 맛처럼 처음에는 담담하지만 반복할수록 신뢰를 쌓아간다. 양인모의 연주는 그렇게 설명보다 태도가 먼저 전해지는 음악으로 남는다. 자극은 없다. 대신, 다시 찾게 되는 이유가 남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때때로, 이미 설명이 끝난 연주자의 공연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과거의 영광이 현재를 대신할 때 기대는 사라지고 감상은 의무가 된다. 그러나 양인모의 연주는 그런 망설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무대는 언제나 다시 들어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는 단지 실력이 검증된 연주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음악을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게 만드는 연주자다. 그의 연주는 완성의 증거가 아니라, 사유가 아직 진행 중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그의 다음 연주를 기다린다. 완성된 음악이 아니라 아직 생각 중인 음악을, 더욱 나은 경지로 오르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서.
구본숙 사진작가

19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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