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조기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연공서열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 논의가 급부상했다. 보수·진보 진영 모두 법정 정년 연장을 비롯한 계속고용 필요성에 공감하는 가운데 핵심 쟁점인 임금체계 개편이 전제돼야 한다는 주장이 공통적으로 나오면서다. 임금체계 개편은 근속연수 등 연공서열 중심의 보상 체계를 성과·직무 중심으로 바꾸는 게 핵심이다. 다만 노동계에서 ‘임금 감소 없는 정년 연장’을 주장하며 강하게 반발해 이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정책 싱크탱크인 ‘성장과 통합’의 유종일 상임대표는 17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연공서열 중심의 호봉제는 지금의 역피라미드 인구 구조상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원장을 지낸 유 상임대표는 전직 관료와 각계 전문가 500여 명이 참여한 성장과 통합을 이끌고 있다.
유 상임대표는 “과거에는 연공서열에 기반한 보상 체계의 합리성이 인정됐는데 지금 같은 초고령사회 인구 구조하에서는 고용시장이 감당할 수 없다”며 “정년 연장도 지금의 연공서열 체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유 상임대표는 “(노동계에서) 과격한 소리라고 할 수 있지만, 경제 이론 관점에서는 그렇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은 이날 직무성과급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과 정년 유연화·계속고용제 도입을 대선 공약으로 내놨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성과보다 직급이 우선인 구조에서는 청년이 좌절할 수밖에 없고 기업은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게 될 것”이라며 “임금 총액은 유지하되 초임자와 고연차 직원 간 보수 격차를 완화하고 성과와 책임이 연동되는 구조로 임금체계를 바꿔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겠다”고 말했다. 그는 현행 정년 60세와 관련해 “현재 63세, 향후 65세까지 상향될 연금 수령 시기와도 심각한 불일치 문제를 불러온다”며 “중장년층의 경륜이 우리 사회에서 계속 쓰일 수 있는 구조를 만들겠다”고 했다.
최근 ‘정년연장 태스크포스(TF)’를 띄운 민주당은 연내 법정 정년 연장 입법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이 후보는 지난 2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정년 연장 논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국민의힘도 최근 관련 법안을 처음으로 발의했다.
진보·보수 모두 "연공서열式 임금체계 바꾸자"
李 싱크탱크 "지금 인구구조상 호봉제 더이상 유지되기 어려워"
법정 정년 연장, 근로자 퇴직 후 재고용 등을 포괄하는 ‘계속고용’ 필요성이 커지는 건 저출생·고령화로 산업 현장에서 일할 생산가능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데다 국민연금 수급 시기(65세)와 정년(60세) 간 미스매치인 ‘소득 크레바스’ 문제가 현실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도 크게 이견이 없다.
핵심 쟁점은 연장된 근로 기간 임금체계를 어떻게 할지다. 노동계는 ‘임금 감소 없는 정년 연장’, 경영계는 ‘임금체계 개편을 전제로 한 계속고용’을 주장하며 부딪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보수·진보 진영에서 공히 연공서열 중심의 기존 임금체계를 고치는 게 계속고용의 전제가 돼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李 싱크탱크 “연공서열 유지 불가능”
정치권에서 정년 연장 논의를 먼저 띄운 건 더불어민주당이다. 유력 대권 주자인 이재명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는 지난 2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인공지능(AI) 시대에 대비한 노동시간 단축, 저출생과 고령화, 생산가능인구 감소에 대비하려면 정년 연장을 본격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조기 대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큰 시점에서 이뤄진 연설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대선 공약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민주당은 경영계와 노동계, 청년이 참여하는 ‘정년연장 태스크포스(TF)’를 공식 출범시켰다. 하반기에 당 차원의 단일 법안을 마련해 입법을 마무리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미 민주당에서만 정년 연장 관련 법안을 9개 발의했다.
이런 가운데 유종일 ‘성장과 통합’ 상임대표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연공서열 체계에서는 정년 연장이 불가능하다”고 밝힌 건 직무·성과 중심으로 보상체계를 바꾸는 것을 전제로 정년 연장을 논의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도 “기존 연봉을 유지하면서 정년을 연장하는 건 기업 부담이 너무 커진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진다”며 “임금피크제를 강제하고 법정 정년을 연장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했다.
◇ 국힘도 “지속 가능 계속고용 제도화”
이날 직무·성과급제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을 대선 공약으로 내놓은 국민의힘도 계속고용 방안을 논의해왔다. 직무급제를 도입해 연공서열이 아니라 직무와 성과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고, 정년 이후 ‘계속고용’을 원할 때는 성과만큼만 받아가는 구조를 만들자는 게 국민의힘 구상이다. 기업은 임금 총액을 유지해 지속 가능한 계속고용을 제도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고령화가 현실이 되고 국민 건강을 비롯한 제반 여건이 크게 바뀌었음에도 현행 정년은 60세에 머물러 있다”며 “일할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일하겠다는 의지가 있어도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기계적 정년에 묶여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고 했다. 최근 노동계 출신인 김위상 의원이 계속고용 의무를 부과하되 기업이 정년 연장과 퇴직 후 근로자 재고용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노동계 반발은 넘어야 할 산
관건은 정치권이 노동계 반발을 어떻게 넘어설지다. 특히 민주당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노동계를 설득할 수 있을지가 핵심이다.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노동계의 저항과 반발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직무·성과 중심으로 임금체계가 개편되면 생산성과 상관없이 근속연수에 따라 높은 임금을 받는 고령의 조합원들이 피해를 본다는 게 노동계 입장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 따르면 30년 이상 일한 근로자의 월(月) 급여는 1년 미만 근로자 급여보다 2.95배 많다. 유렵연합(1.65배·2021년 기준)보다 월등히 많다.
일각에서는 자칫 법정 정년만 58세에서 60세로 늘리고, 이에 상응하는 임금피크제는 ‘권고 사항’으로만 도입한 2013년 사례가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당시 기업 부담을 덜어주는 차원에서 임금피크제 도입을 추진했지만 노동계 반발로 입법화하지 못했다. 이후 정부 권고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들은 결국 줄소송(임금피크제 무효소송)을 당해 예기치 못한 피해를 봤다.
한재영/김형규/정소람/곽용희 기자 j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