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예의 이심전심] 봄날의 제라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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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예의 이심전심] 봄날의 제라늄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얼마 전까지 꽃구름을 이루더니 바람에 꽃비가 돼 흩날리던 모습은 마치 덧없는 인생처럼 여겨진다. 꽃처럼 아름답고 찬란한 시절이란 뜻의 화양연화(和樣年華)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행복한 순간은 꽃 같은 시절에나 있던 한낱 짧은 꿈이었던가. 나이 들수록 그래서 봄은 아름답고도 애달픈 계절이다.

나는 봄을 좋아한다. 겨우내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생명의 기운이 좋고, 순식간에 온 세상을 환하게 바꾸는 봄꽃 또한 사랑한다. 앞으로 이토록 좋은 봄을 몇 번이나 맞이할까. 추운 겨울이 싫어서 먼저 봄을 맞을 수 있는 따듯한 도시에서 지내기도 한다. 봄이 아까워서 조금이라도 봄을 더 늘려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런데 봄이 오는 길목에서 어머니와 영영 이별했다. 나처럼 유난히 봄을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봄볕에 벙그러진 꽃잎마다 아롱졌다. 어머니 떠나신 세상에서 화사한 봄꽃을 보는 게 슬펐다. 봄은 봄인데 내 마음은 봄이 아니었다. 짧은 봄은 마음이 회복되기도 전에 속절없이 지나버렸다. 봄꽃 진 자리엔 어느덧 연둣빛 잎이 돋고 세상은 하루가 바쁘게 초록의 채도가 높아진다.

돌이켜보면 10여 년 전, 번아웃이 왔을 때 마당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감행한 적이 있다. 3년간 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마당으로 나가 꽃의 얼굴을 보며 눈인사하고 물 주고 세심히 보살폈다. 꽃을 심고 가꾸는 일이 바로 내 마음을 꽃처럼 돌보고 가꾸는 일이란 걸 그때 깨달았다.

그 추억이 생각나 아름다운 꽃으로 멋진 정원을 가꾸는 유튜브 동영상을 자주 봤다. 그럴 때면 등불이 켜지듯 마음이 환해졌다. 그러다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키울 수 있는 제라늄에 마음이 빼앗겨서 여러 종류의 제라늄을 분양받거나 종류별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제라늄은 봄에만 화려한 꽃을 피우는 리갈계 말고 사계절 꽃을 피우는 조날계도 있다. 유럽, 러시아 제라늄, K제라늄 등 수백 종의 이름 외우기도 힘든 초보 식집사지만, 제라늄은 꽃도 아름답고 어디서나 잘 적응하고 번식력도 좋아 갈수록 매력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제라늄을 키우면서 특별하고 신기한 것은 생명의 확장과 나눔이다. 제라늄에게 봄은 삽목의 계절이다. 가지나 꽃이 무성할수록 더 건강하고 풍성한 꽃을 위해 모주(母株)에서 과감히 가지치기를 하고 순을 따주고 꽃대도 잘라내야 한다. 잘라낸 가지는 삽목으로 뿌리를 내려 대를 이어 2대, 3대로 번식한다. 잘라낸 삽수가 2주 정도 되면 흰 뿌리가 돋아 작은 화분에 둥지를 틀고 분가할 수 있다. 최근에는 삽목이 꽤 성공해서 새끼 화분을 여러 개 얻을 수 있었다. 좀 더 키워서 친구와 지인들에게 이 화분을 나눠주고 선물할 생각을 하니 그 생명의 연결이 눈물겨웠다.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 아이를 낳고 또 생명을 이어가는 내 몸도 제라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라늄 삽수에서 흰 뿌리가 돋아나듯 조금씩 내 안에서 투명한 흰 뿌리가 돋아나와 일상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다시 살아갈 힘이 자라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이별의 슬픔과 상실이 어머니에 대한 애도와 고마움으로 바뀌는 게 느껴진다. 제라늄의 생명력이 내 마음을 조금씩 위로하고 치유하고 있는 걸까. 이별의 슬픔을 견디기에 좋은 계절이 있을 리는 없지만, 봄날의 제라늄꽃을 돌보며 그 회복의 이치를 나는 조용히 배우고 있다. 상실 이후의 삶 또한 다시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을. 사람이 아닌 말 없는 식물인 제라늄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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