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여 아직 절반의 길이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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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5.05.16 00:00 수정2025.05.16 00:01

해와 달
명재신

해가 지기 전에
달이 떴다

함께한 세월이 있어
닮았구나 싶었는데
어찌 보니
무색하고 무감하구나.

화상전화로
잠시 만나
건성으로 아이들 안부만
대충 묻고 마는

요사이의
아내와 나만 같이

동쪽에 돋은
해 같은 달

서쪽에 지는
달 같은 해

내일을 위해
이만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고

손을 흔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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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아직 절반의 길이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명재신 시인의 시집 『아라비아 사막 일기』에 나오는 시입니다. 시인은 건설회사의 베테랑 엔지니어로 오랫동안 해외에서 근무했습니다다.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 등에서 보낸 시간만 13년에 이르지요. 그 경험들이 시집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사막은 막막한 곳입니다. 섭씨 45도가 넘는 열사의 땅에서 까다로운 발주자의 대리인을 상대로 여러 나라 엔지니어와 작업자들을 이끌어야 하는 프로젝트 자체가 그에게는 또 다른 사막이었을 겁니다.

그 고단한 시간 속에도 한 줄기 오아시스 같은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고국의 가족과 나누는 영상통화입니다. ‘해와 달’은 바로 그 짧은 순간에 스치는 온갖 상념을 20행의 단문에 응축해낸 작품이지요.

사막의 건설 현장에서 퇴근해 숙소에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오후 7시. 시인은 작업복을 벗자마자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부터 겁니다. 그때 한국 시각은 새벽 1시. 아쉽고 안타까운 영상통화로 식구들의 안부를 묻는 것이 고작이지만 그래도 날마다 연애하듯 달콤한 시간입니다. 새벽 6시 반에 출근해야 하는 아내는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자는 생활이지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속 깊은 반려자이지요.

젊은 날 그는 이렇게 귀한 아내를 얻느라 무진 애를 썼습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늦깎이로 대학에 복학한 그의 눈에 어느 날 섬광처럼 ‘꽂힌’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조심조심 온갖 정성을 다해 마음을 전했으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를 100편이나 써서 통째로 선물했습니다. 그래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대학문학상 수상식장에서 받은 꽃다발도 바쳤습니다.

그렇게 일편단심으로 이룬 사랑이었기에 세월이 흐를수록 애틋함이 더했습니다. 이역만리 사막에서 13년이나 떨어져 지냈으니 오죽했을까요. ‘해’와 ‘달’이 날마다 동쪽, 서쪽에서 뜨고 지는 동안 서로 ‘닮았구나’ 싶은 것은 그 속에 함께한 시간의 지층이 넓게 겹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교감과 공감의 바탕 위에서 그가 흘린 땀은 야자나무에 주렁주렁 열리는 과실이 되기도 합니다. 그가 ‘대추야자’라는 시에서 ‘내가 여기서 하는 몸 고생들/ 모이고 모이면 저만큼의 주름을 안게 될까// 이것들 모두/ 신의 선물이라니// 내가 여기서 하는 맘 고생들/ 쌓이고 쌓이면 저만큼의 당도(糖度)를 얻게 될까’라고 노래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비도 없고 물도 없는 사막에서/ 모래폭풍을 건너고 혹서기를 지나고서야/ 비로소 주렁주렁 열리는// 참고 참았던 내 눈물방울들/ 절고 절여진 내 땀방울들이// 신의 뜻이 되고/ 신의 선물이 된다니’라는 대목에서는 눈물과 땀방울이 당도 높은 대추야자 방울로 승화됩니다.

이런 것들이 다 사막에서 발견한 삶의 알갱이요, 모래폭풍 속에서 피워 올린 꿈의 꽃이지요. 그는 ‘사막의 길’이라는 시에서도 우리 인생의 긴 여정을 투영시킵니다. ‘어떤 길은 가도 가도 사막일 때가 있다/ 저 나름의 높이로 혹은 깊이로/ 살아온 길이 산이 되고 골이 되어 있다’.

그 삶의 높낮이 사이에서 ‘가도 가도 그 길이 그 길이라서/ 가는 건지 멈춰 서 있는지가 어림되지 않을 땐/ 나무 한 그루 낙타 한 마리라도 만나면/ 아직 살아 있다고 위안이 되리라’며 그는 자신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이제야 절반을 넘어온 모래 언덕에서/ 저기 머언 유혹들 가령 신기루 같은 거/ 농염한 곡선의 모래 능선들 같은 거’를 ‘지평이 가까워지도록 석양이 다하도록’ 생각하면서 ‘아직 절반의 여정을 건너야 한다’는 삶의 여로를 되새깁니다.

그 끝에 ‘내 지나온 길이 지루해지면/ 지글거리던 태양조차도/ 오른쪽으로 내려와 친구가 되고/ 문득 지나온 길들이 눈물이 된다’는 깨달음의 중간 지점쯤에 도달해서는 ‘그대여 아직 절반의 길이다’를 혼자 되뇌곤 합니다.

이 시의 비유처럼 우리에게도 지난 삶은 ‘절반의 길’이었습니다. 남은 길을 어떻게 걸어야 ‘꿈의 오아시스’ 아래 경건한 ‘경배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동쪽에 돋은/ 해 같은 달’과 ‘서쪽에 지는/ 달 같은 해’가 서로 손을 흔들며 ‘내일을 위해/ 이만/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고’ 어깨를 다독이는 것 같은 삶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아내에게 줄 선물로 시집을 찬찬히 엮은 시인의 손끝에서도 당도 높은 ‘대추야자’ 향기가 퍼져 나왔을 듯합니다.

그는 최근 정년퇴임식을 갖고 은퇴했습니다. 하지만 시를 향한 그의 여정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이제는 먼 이역에서 ‘동쪽에 돋은/ 해 같은 달’과 ‘서쪽에 지는/ 달 같은 해’를 따로 올려다보지 않고 아내와 함께 손잡고 바라보게 됐으니 한결 여유로운 여정이 될 것 같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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