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Z세대의 ‘마이크로 네트워킹’
낯선 이들과 모여… 독서-운동-모닝커피
통성명도 생략… “관계 부담 덜고, 각자 할 일 해요”
대학가 MT 무산… 가평 펜션 대신, 도심 파티룸 모임
“문득 공허한 마음”… 관계 발전 노력 필요
7일 오후 4시 서울 마포구의 한 공유 오피스에 들어서자 한 30대 여성이 이렇게 물어왔다. 모인 이들은 취업준비생부터 프리랜서 번역가, 콘텐츠 마케터, 디자이너까지 다양했다. 대부분 서로 처음 보는 사이였다. 이들은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은 뒤 실명이 아닌 별칭으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인사가 끝나자 곧바로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밀린 기획서를 쓰거나 화상회의에 참여하는 이도 있었고, 취미 삼아 인공지능(AI)으로 음악을 만드는 이도 있었다. 각할이란 ‘각자 할 일’의 준말이다.
시간이 흘러 오후 6시 반, 저녁 시간이 됐다. 마침내 회식 장소로 이동하려나 했건만, 꺼낸 음식도 따로따로였다. 일부는 밖에서 김밥을 포장해 왔고, 어떤 이는 집에서 준비해 온 샐러드와 과일을 입에 넣었다. 식사 중에는 소소한 이야기가 오갔다. “망원시장은 과일과 채소값이 진짜 저렴하다”거나 “연두색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소소한 주제의 대화가 오갔다. 전통주 관련 전시 준비, 콘텐츠 제작 워크숍 기획 과정 등 각자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30분쯤 대화를 나눈 뒤 이들은 다시 각자 자리로 돌아가 할 일을 이어갔다.
이는 ‘각할모’, 즉 ‘각자 할 일 하는 모임’의 현장이었다. ‘모각공’(모여서 각자 공부), ‘모각작’(모여서 각자 작업) 등으로도 부른다. 말 그대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한 공간에 모여 가벼운 잡담을 나누면서 각자 할 일을 하는 모임이다. 모임을 연 정연이 씨(34)는 “혼자 일할 때보다 집중이 잘되고, 낯선 사람들과 짧게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며 “누구나 부담 없이 머물 수 있는 느슨한 모임을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참가자 홍민지 씨(31)는 “모인 채로 작업하면 집중이 더 잘되는 것 같아 각할모에 자주 참석한다”고 했다.● 목적만 채우고 헤어지는 2030
친밀한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새로운 사람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일상을 환기한다. 독서, 운동 등 취미를 함께하는 모임을 넘어 모닝커피 챗 등 유형도 다양해지고 있다.
7일 오전 8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열린 모닝커피 챗 모임이 그랬다. 주최자가 “오늘은 ‘요즘 기분 좋았던 일’을 3가지씩 이야기해 보자”고 하자 출근을 앞둔 5명은 커피를 마시며 짧게 자기 경험을 꺼냈다. 책을 읽으며 철학적인 고민을 한 경험, 귀여운 비숑프리제 강아지와 보낸 하루 등이었다. 약 1시간 반 동안 서로 직업이나 나이를 묻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모임을 마친 이들은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한 뒤 각자 출근길에 올랐다. ‘마이크로 네트워킹’은 별도의 가입 절차나 회비가 없어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는다. 이날 참석한 각할모는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참석할게요”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걸로 신청이 끝났다. 아침에 열린 커피 모임도 주최자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쪽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신원 노출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해 대부분의 모임은 서로를 별칭으로 부른다. 등산 모임에 두 번 참여했다는 문모 씨(24)는 “관계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해 등산 내내 곰돌이, 야근맨, 헤헷, 텐동 등 별칭으로만 서로를 불렀다”고 말했다.20, 30대 사이에서 지역 기반의 느슨한 관심사 모임은 빠르게 느는 추세다.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에 따르면 올해 1∼6월 커뮤니티 탭 내 ‘모임’ 수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74% 늘었다. 모임 가입자는 1.3배로 증가했다.
● 친구와 달리 ‘필요한 만큼’만 함께
젊은 층이 이런 모임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관계 자체에서 오는 무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친구라는 이유로 당연시되는 배려마저 가끔은 의무감으로 다가오는데, 여기서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일회성 모임을 찾는다는 이도 있었다. 문 씨는 “친구와 등산을 가려면 일정도 맞춰야 하고, 산행 뒤 식당이나 카페까지 가는 게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경우가 많아 하루가 길어질 수 있다”며 “반면 모임에 가입하면 등산만 하고 나올 수 있어서 편하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는 대학 문화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대학가에선 학생의 저조한 참여 탓에 MT 자체가 무산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고려대 미디어학부는 5월 2학년생 중심으로 MT를 준비하다가 참여자가 턱없이 미달해 행사를 취소했다. 이 학부 25학번 김율리 씨(20)는 “음주 문화도, 잘 모르는 다수와 하루를 보내는 것도 부담스러워 MT에 불참했다”고 말했다. 이는 명지대, 서울여대 등 다른 주요 대학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흐름 탓에 과거 ‘MT의 성지’로 불리던 경기 가평군의 펜션, 농어촌 민박 수도 2020년 1210곳에서 지난해 1067곳으로 5년 동안 100곳 넘게 줄었다. 반면 회사 워크숍 등 장소로 도심 파티룸 등이 선호되는 추세다. 공간대여 플랫폼 스페이스클라우드에 따르면 플랫폼 내 ‘파티룸’ 카테고리의 예약 건수는 2021년 약 3만9000건에서 지난해 약 10만 건으로 약 2.5배로 증가했다.● 느슨하지만 안전한 관계를 이어가려면
20, 30대라고 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가 없는 건 아니다. 계속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일부러라도 이런 모임을 찾는다는 이도 적잖다. 윤모 씨(30)는 “친구와는 서로 너무 잘 알고 대화도 비슷하게 흘러가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 모이면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유익하다”고 말했다.
다만 느슨한 만남이 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약 3주 전 영어 회화 모임에 참석했던 회사원 김나현 씨(24)는 “새로운 사람과 친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안고 뒤풀이에 참여했지만,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아 그 속에 있는 나를 보며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며 “그 자리에서는 SNS 계정을 서로 나눴다가 이후 차단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모임은 최소한의 규칙을 두고 있었다. 배드민턴 소모임에 1년 가까이 참여하고 있는 김희문 씨(26)는 “실명제와 지각 경고, 운동 후 인증사진을 남기는 규칙이 있어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각할모 역시 문은 열려 있지만 장기간 참여하지 않으면 회원 명단에서 정리된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얕은 사회적 관계는 자칫 피상적인 만남에 그칠 수 있다”며 “피상적인 관계에서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 만나는 경험으로 나아가도록 구성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다겸 기자 gyeom@donga.com
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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