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번영 상실의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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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번영 상실의 세대

최근 대선에서 20대 유권자의 선택은 성별에 따라 극명히 갈렸다. 20대 남성의 74.1%는 보수 후보를, 여성의 58.1%는 진보 후보를 지지했다. 이 같은 젠더 이슈 중심의 선택은 청년층이 정당 이념보다 공정, 실익,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탈이념적 실용주의 세대임을 보여준다.

오늘날 청년층, 특히 2030세대는 기성세대와 다른 정치 감수성을 가졌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조사(2022)에 따르면 미국 청년의 절반 이상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일본 싱크탱크 겐로(言論)NPO 조사(2023)에서도 20대의 70.9%가 “지지 정당이 없다”고 밝혔다. 한국 청년들 역시 민주주의 이념엔 공감하지만, 제도엔 불신을 드러낸다(World Values Survey, 2022). 야샤 몽크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이들을 ‘이상은 믿되, 시스템은 믿지 않는 세대’로 정의했다.

청년들은 체제 자체를 부정하진 않지만, 그 체제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특히 한국 청년들은 정당엔 무관심하면서도, 젠더·공정성·기후 위기·생존 가능성 같은 구체적 사안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태도는 단지 ‘세대 특성’이 아니라 구조적 현실에 대한 반응이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을 번영 속에 태어난 운 좋은 세대로 보지만, 실제로 이들은 번영을 ‘인식’은 하되 ‘경험’하진 못한 세대다. 부모 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소득 100달러에서 3만달러로 도약했고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경험했다. 반면 청년들은 성장 정체기에 태어나 그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성장 이전 세대’가 번영의 수혜자였다면, ‘성장 이후 세대’는 그 책임과 부담을 짊어진 세대다. 말 그대로 ‘번영 상실의 세대’다.

2030세대는 팬데믹, 인공지능(AI) 대전환, 주거난, 연금 고갈 등 복합 위기의 한가운데 있다. 리처드 레이어드 런던정경대 교수는 진정한 번영은 단순한 소득이 아니라 삶의 통제감, 미래에 대한 낙관, 사회적 유대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년들은 이 셋 모두에서 배제돼 있다.

보건사회연구원(2022)에 따르면 청년 10명 중 4명은 자신을 사회·경제적 하위층으로 인식하고, 60%는 계층 상승이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우울할 때 대화할 사람이 없다’는 청년은 31.6%, 은둔형 청년은 54만 명에 달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청년 자살률 1위라는 통계는 이 세대가 처한 절망을 보여준다.

이런 현실에서 청년들이 공공성보다 생존 가능성, 사명감보다 경제 안정을 우선시하는 건 자연스럽다. 고시생은 공직보다 대기업을, 법조인은 인권보다 로펌을, 수재는 공대보다 의대를 택한다. 대학생들조차 등록금과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주식과 코인 투자에 몰두한다. 경제적 안정이 최우선이 된 사회에서 아파트값 폭등은 모든 가치를 돈과 부동산으로 수렴시켰고, 결혼과 출산은 생존을 위한 포기가 됐다. 이는 축소된 번영의 무대가 만든 결과다. 신뢰할 수 없는 제도, 기대할 수 없는 미래 속에서 실용주의만이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됐다.

그러나 정부의 청년 정책은 여전히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구직활동지원금, 주거지원금, 생활지원금 등 각종 ‘지원금’은 늘었지만, 정작 번영의 무대는 더욱 좁아졌다. 이런 선거용 단소형(短小型) 정책은 장대(長大)한 번영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한국 청년에게 베트남·인도·중국 청년들처럼 뜨거운 열정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장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IMF 외환위기 직후, 한국 정부는 과감한 정보기술(IT) 인프라 투자와 규제 개혁을 통해 ‘디지털 한국’이라는 새로운 번영의 무대를 열었다. 청년들은 그 비전 속에서 기회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은 정치적 혼란과 불안정한 리더십으로 인공지능(AI) 선도국가로 도약할 기회를 놓쳤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다. 보수·진보의 진영 대립 속에서 4차 산업혁명의 골든타임을 흘려보내는 사이, 미국과 중국은 AI 인프라와 투자에서 앞서 나갔다. 그 결과 AI 기반의 번영은 멀어졌고, 오늘의 청년에겐 ‘번영 상실’이라는 뼈아픈 현실만 남게 됐다. 청년들은 더 이상 미래를 설계할 무대조차 찾기 어려운 시대에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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