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수령 위임장' 제3자에게 임금지급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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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수령 위임장' 제3자에게 임금지급해도 될까

어떤 공사 현장에서 해체공으로 일한 근로자들이 공사가 종료되고 사업주에게 임금을 지급해 달라고 청구했다. 그런데 사업주에게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근로자들은 처음 일을 시작하면서 '임금수령 본인동의서(위임장)' 또는 '임금 대리수령 확인서'를 작성하여 사업주에게 제출하였고, 해당 서류에는 본인계좌 사용불가를 이유로 A에게 임금의 대리수령을 위임한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기에, 당연히 사업주는 그 서류에 따라 임금을 일괄하여 A에게 이미 지급하였기 때문이다. 사업주는 임금을 이중으로 지급할 수는 없으므로, 서류를 보여주면서 당신들이 제출한 서류 내용 그대로 임금을 벌써 다 지급했는데 이제 와서 딴 소리냐고 따졌다. 사업주는 그대로 있어도 될까? 상식적으로 보면 사업주는 근로자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임금을 지급했으므로, 다시 임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사용자는 근로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근로기준법 제43조에 있다. “임금은 통화로 직접 근로자에게 그 전액을 지급하여야 한다. 다만, 법령 또는 단체협약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임금의 일부를 공제하거나 통화 이외의 것으로 지급할 수 있다”고 명시한 법조문이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원칙이 임금지급 4원칙이다. 제1원칙은 ‘직접 지급의 원칙’이고, 제2원칙은 ‘통화 지급의 원칙’이며, 제3원칙은 ‘전액 지급의 원칙’, 마지막 제4원칙은 ‘월 1회 이상 정기 지급의 원칙’이다. 실무에서 가장 많이 문제되는 것은 사용자가 임금을 착오로 추가 지급했을 때 간편하게 상계처리를 할 수 있는지, 즉 ‘조정적 상계’가 허용되는지인데, 이 문제는 제3원칙인 전액 지급의 원칙 문제로 풀어야 한다. 회사의 경영상황이 악화되어 부도 직전에 처하거나 회생 절차에 돌입하면 종종 고통분담 차원에서 임금반납 결의를 하기도 하는데 그 효력이 문제될 때 역시 제3원칙인 전액 지급의 원칙이 등장하는 국면이다.

위에서 본 사건에서는 제1원칙, ‘직접 지급의 원칙’이 문제였다. 이렇게 임금을 직접 지급하도록 하는 취지는 임금이 확실하게 근로자 본인에게 지급되도록 하여 그의 자유로운 처분에 맡기고 근로자의 생활을 보장하려는 데 있다. 따라서 근로자의 친권자나 법정대리인에게도 임금을 지급하여서는 안 된다.

법규정의 문언상 통화 지급의 원칙이나 전액 지급의 원칙과 달리 직접 지급의 원칙은 법령 또는 단체협약에 의한 예외가 인정되지 아니한다. 다만 선박소유자는 승무 중인 선원이 청구하거나 법령이나 단체협약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임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그가 지정하는 가족이나 그 밖의 사람에게 통화로 지급하거나 금융회사 등에 예금하는 등의 방법으로 지급하여야 한다(선원법 제52조 제3항).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용자가 월급 봉투에 현금을 담아서 임금을 지급했는데 장기 항해를 하는 선원은 임금을 받아도 바로 은행에 맡길 수 없고, 실제 돈이 필요한 사람은 육지에 있는 가족이므로, 그러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 선원법상의 예외 조항이다.

요즘은 임금을 대부분 근로자 본인 명의 계좌로 이체하는 방식으로 지급하므로, 직접 지급의 원칙이 문제될 상황은 많지 않지만, 여전히 현금으로 지급하는 경우도 남아 있고, 어떤 사유로든 제3자 명의 계좌로 송금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임금 직접 지급의 원칙이 간혹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선원인 경우 외에 임금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예외없이 근로자 본인에게 직접 또는 그의 계좌로만 지급해야 할까? 대법원은 최근 ‘근로자 본인이 직접 수령할 수 없는 사정에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사자(使者)에 의한 임금의 수령도 가능할 수 있다’고 최초로 선언하면서 근로기준법 제43조의 규정 형식이나 취지 등에 비추어 보면, 사회통념상 근로자 본인에게 지급하는 것과 동일시되는 사람 또는 근로자 본인에게 그대로 전달할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임금을 수령할 때에만 그를 사자로 보아야 하고, 이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엄격하게 판단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다(대법원 2025. 6. 12. 선고 2025다209645 판결). 여기에서 사자는 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앞의 사건에서 A는 '근로자들을 전혀 모르고, 해체팀 팀장(이른바 십장)과 회사 직원이 위임장과 신분증을 보내주어 자신의 계좌로 임금이 지급되면 그 임금을 팀장에게 보내주었다'는 취지로 증언하였는데, 이를 토대로 엄격 판단의 원칙상 A를 근로자들의 사자(使者)로 보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근로자들이 처음부터 자신들도 모르는 A에게 임금을 지급해도 된다는 위임장을 작성했고, 사용자로서는 근로자들이 A와 어떤 사이인지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며, 결국 임금을 이중으로 지급해야 하므로, 사용자는 무척 억울한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근로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용자는 다시 A나 해체팀장을 상대로 부당이득반환청구를 하여 처음 지급한 임금을 회수하여야 하나, 만약 A나 해체팀장이 재산이 없다면 현실적인 추심이 곤란하여 경제적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임금 직접 지급의 원칙이 등장하는 국면이 또 있다. 근로자가 제3자에게 임금채권을 양도하는 상황이다. 임금채권을 양수한 제3자는 사용자를 상대로 임금을 지급하라고 청구할 수 있을까? 대법원은 근로기준법이 임금직접지급의 원칙을 규정하고 그에 위반하는 자는 처벌을 하도록 하는 규정(제109조)를 두어 그 이행을 강제하고 있는 이유는 임금이 확실하게 근로자 본인의 수중에 들어가게 하여 그의 자유로운 처분에 맡기고 나아가 근로자의 생활을 보호하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취지에 비추어 보면 근로자가 그 임금채권을 양도한 경우라 할지라도 양수인 스스로 사용자에 대하여 임금의 지급을 청구할 수는 없다고 해석하여야 한다고 보았다(대법원 1988. 12. 13. 선고 87다카2803 전원합의체 판결).

이러한 결론에 대하여 근로자가 일단 자유의사에 따라 임금채권을 양도하여 버렸는데도 이를 사용자로부터 직접 지급받은 후가 아니면 양수인에게 지급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근로자나 양수인에게 번거로운 부담만 더하여 주는 것이고 만일 임금채권을 양도한 근로자가 양수인에게 그 지급을 거절하거나 이미 양수인에게 지급해 버린 사용자에게 다시 그 임금의 지급을 구하게 된다면 그들 사이에 또 다른 분쟁만 낳게 할 뿐이라는 비판이 있다. 과연 대법원 판결이 근로자와 사용자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규율하는 것인지는 심사숙고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보인다. 원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합당한 사유가 있다면 적절한 예외를 인정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훨씬 타당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재까지 대법원은 임금 직접 지급의 원칙을 매우 강하고 엄하게 적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으므로, 사용자는 근로자가 위임장을 작성하여 제3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라고 요청하여도 이를 바로 받아들이면 안 되고, 제3자와 관계를 밝히도록 하고, 직접 수령하지 못하는 사유를 상세히 기재한 확인서를 받는 등의 방법을 모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임금을 두 번이나 지급해야 하는 사용자가 있을 수 있으니 오늘의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이명철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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