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이재승]트럼프의 나토 해체 협박, ‘동맹의 체스판’이 다시 짜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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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재편은 현실, 형식보다 기능-내용 중요
‘동맹의 동맹’ 활용해 새 신뢰 구축할 필요
‘동맹 이후’ 체스판에서 설 자리 설계해야
고립 피하는 팀 플레이 할 때 협상력도 생겨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 전쟁 국면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향해 던진 독설은 예사롭지 않다. “우리가 필요로 할 때 나토는 곁에 없었다”, “우리는 나토에 수조 달러를 쏟아부었지만, 그들은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는 실제 전쟁 상황에서 동맹의 조건 자체를 흔드는 선언이다. 트럼프에게 동맹은 더 이상 자동적 규범이 아니라 기여와 순응에 따라 재협상되는 ‘계약적 관계’다. 방위비부터 군사적 기여까지 모두 가격표 위에 올리는 이 방식은 이제 미국 전략의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다.

법적으로 미국이 나토를 탈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동맹은 법적 상태보다 실제 행동으로 정의된다. 미국은 탈퇴하지 않고도 미군 재배치, 나토 조약 제5조 집단방위 규정의 조건부 해석, 핵 억지력의 모호성만으로 나토를 무력화할 수 있다. 억지력은 조약 문구가 아니라 신뢰 위에서 작동한다. 트럼프의 언사는 이미 동맹의 실질을 비워내고 있다. 이 압박은 조만간 한반도와 인도태평양에서도 유사하게 재현될 것이다.

이런 변화가 대서양을 흔들던 이번 주 나토 30개국 대사단이 방한해 한국의 외교·안보 상황에 대해 브리핑과 질의응답을 하는 자리를 가졌다. 유럽 측이 내심 궁금해한 것은 한국이 과연 함께 가는 전략적 동반자인지 여부였다. 한 참석자는 “대서양 동맹과 인도태평양은 멀어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필자는 반문했다. “대서양 동맹과 인도태평양이 과연 한 번이라도 충분히 깊게 사귄 적이 있었는가.” 지금은 한국과 유럽이 서로에게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고, 유럽도 더 적극적으로 나설 때라고 답했다. 다른 참석자가 왜 공이 유럽 쪽에 와 있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정중히 답했다. “이젠 모든 파트너십을 당연하게 볼 수 없다. 국제 정세도, 한국의 정치 상황도 바뀌었다.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유럽도 한국도 서로에게 충분한 신뢰를 보여야 한다.”

유럽은 안보 인식의 전환에 비해 움직임이 느리다. 걱정 없이 오래 지내온 ‘부잣집 나토’가 아직 절실함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도 지우기 어렵다. 하지만 트럼프의 동맹 해체론 앞에서는 유럽과 한국은 사실상 한 배를 타고 있다.

한국은 트럼프라는 개인을 넘어 재편되는 ‘동맹의 체스판’을 직시해야 한다. 나토 해체 위기는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위협인 동시에 기존의 동맹 위계를 뒤흔드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동안 유럽은 미국에 최상위 동맹, 일본은 핵심 축이었고 한국은 그다음이었다. 그러나 이 질서가 흔들리는 지금, 한국은 새로운 위치를 점유할 전략적 공간을 맞이했다. 다음 단계에서는 ‘동맹의 동맹’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은 그동안 한미동맹이라는 단일 축을 붙잡고 버텨 오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지금 재편되는 것은 양자 관계만이 아니다. 유럽, 일본, 호주를 잇는 다층적 네트워크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나토+인도태평양 4개국(IP4·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은 그런 변화의 조짐이었다. 이 구조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지만 활용 여부에 따라 충분히 강력한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이제 “얼마를 더 낼 것인가”라는 방어적 질문에서 벗어나 “어떤 전략적 역할을 맡을 수 있는가”를 역으로 제안하는 위치로 옮겨가야 한다. 핵심 산업의 주요 투자처로서 미국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유럽과는 방산과 안보 협력의 폭을 넓혀야 한다. 트럼프만 볼 것이 아니라 미국을 봐야 하고, 양자 동맹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구조를 봐야 한다.

“미국에게 버려지기 전에 빨리 다른 쪽으로 붙자”는 식의 수동적 회피 전략은 하책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일정한 전략적 공간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산업과 달리 안보는 구조적으로 우방이 함께 움직이는 영역이다. 동맹이라는 ‘팀’에서 이탈하는 순간 협상력은 급격히 낮아진다. 확실한 팀 플레이어가 돼야 역설적으로 외교적 자율성과 협상력도 확보된다. 한국도 유럽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맹 이후(Post-alliance)’의 세계를 진지하게 상상해 본 적은 많지 않다. 그러나 지금 전개되는 변화는 새로운 동맹의 모습에 대한 진지한 결단을 요구한다. 체스판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급한 방향 전환이 아니다. 바뀌는 판의 흐름을 정교하게 읽고, 다층적인 동맹 구조 안에서 한국에 가장 유리한 자리를 치밀하게 설계하고 선점하는 일이다. 그 설계도가 향후 수십 년 한국의 안보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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