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연극 무대가 고전으로 채워진다. 소포클레스부터 윌리엄 셰익스피어, 안톤 체호프까지 시대와 국경을 건너온 고전 희곡이 잇달아 막을 올린다. 무대에 서는 얼굴도 묵직하다. 최수종이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로, 거장 신구(90)와 박근형(86)이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으로, 전미도가 체호프의 '갈매기'로 저마다의 고전과 마주한다.
여름 고전 대작의 포문은 최수종의 '오이디푸스'가 연다. 다음달 4일 막을 올려 8월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한다. 2017년 '하늘로 가지 못한 선녀씨 이야기' 이후 9년 만의 연극 복귀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원작인 이 연극은 신탁을 피하려 할수록 오히려 자신이 재앙의 근원임을 깨닫게 되는 한 왕의 운명을 그린다.
관전 포인트는 최수종의 '몰락 연기'다. '태조 왕건' '대조영' 등 대하사극에서 승리하는 영웅을 주로 연기하며 '왕 전문 배우'로 불린 그가 이번엔 무너지는 인간을 맡았다. 최수종은 지난달 충무아트센터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첫 연습 후 일주일 동안은 위약금을 물고서라도 그만두고 싶었다"고 고전 연기의 무게를 토로했다.
그는 이순재, 박근형, 신구, 박정자 등 원로 배우들이 보여주는 발성과 전달력을 보며 무대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도 했다. 서재형 연출과 한아름 작가가 의기투합했고 양준모가 더블 캐스팅으로 함께 오른다. 박정자와 남명렬이 각각 테레시아스와 코린토스 사자로 합류했으며, 그리스 비극의 핵심인 코러스를 단순 관찰자가 아니라 사건과 감정을 주도하는 존재로 확장한 것도 이번 무대의 특징이다.
나흘 뒤 막을 올리는 '베니스의 상인'은 한층 더 묵직하다. 신구와 박근형은 다음달 8일부터 8월 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이 작품으로 다시 뭉친다. 2023년부터 지난해까지 '고도를 기다리며' 전국 공연으로 매진 행렬을 이어간 두 사람이 오경택 연출과 손잡고 셰익스피어로 돌아온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상인 안토니오가 친구를 위해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빚을 갚지 못하면 살 1파운드를 떼어주기로 한 계약과 그를 둘러싼 법정 공방을 그린다.
박근형은 1959년 중앙대 재학 시절 학부 공연에서 맡았던 샤일록을 67년 만에 다시 연기한다. 전 회차 원캐스트다. 박근형은 지난달 서울 NOL 서경스퀘어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20대 때 생각한 샤일록은 권선징악이었지만 지금 이 나이에는 인간 그 자체를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현역 최고령 배우인 신구의 연기 역시 관심을 모은다. 신구는 베니스의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공작 역을 맡는다.
오경택 연출은 같은 자리에서 관객이 '샤일록이 꼭 나쁜가'라는 질문을 떠올리며 연민할 수 있는 인물로 각색했다고 설명했다. 악인으로만 그려져 온 샤일록을 어떻게 입체적으로 재해석할지가 이번 공연의 가장 큰 볼거리다. 1200석 규모 대극장에서 한 달간 이어지는 정통극이라는 점도 이례적이다. 신구는 "서울이 1000만 도시라고 하지만 3만명을 모으는 일이 쉽지는 않다"며 객석을 채우겠다는 의지를 농담처럼 내비쳤다. 두 사람이 청년 배우 육성을 위해 조성한 '연극내일기금'을 통해 선발된 신진 연기자들이 앙상블로 함께 오른다.
여름의 끝자락은 전미도의 '갈매기'가 잇는다. 오는 8월 9일부터 31일까지 서울 광진구 1975 씨어터에서 공연하는 이 작품은 그에게 도전이라기보다 귀향에 가깝다. 2006년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로 데뷔한 전미도는 2018년 드라마 '마더'로 카메라 앞에 서기 전까지 12년간 오직 공연만 한 정통 무대 배우다.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고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천만 배우에 올랐지만, 정식 연극 무대는 2018년 '오슬로' 이후 8년 만이다.
이번 니나 역은 그가 2011년 같은 프로덕션에서 연기했던 배역이기도 하다. 작품은 새로운 예술을 꿈꾸는 청년 뜨레쁠레프와 배우의 꿈을 좇다 부서지는 니나를 통해 삶과 예술, 사랑의 의미를 묻는다. 무대를 떠나 스타가 된 배우가 다시 무대로 돌아와 꿈을 좇다 무너지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배우의 삶과 배역이 자연스레 겹친다. 극단 맨씨어터가 2011년 1층 객석을 걷어낸 실험적 무대로 호평받은 프로덕션을 창단 20주년을 앞두고 재연하는 공연으로, 연출은 동아연극상과 두산연강예술상을 받은 김정이 맡았다.
고전을 정공법으로 마주하는 무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고전의 문턱을 한껏 낮추려는 시도도 이어진다. 올해 마포문화재단 상주단체인 젊은 연극집단 공놀이클럽은 체호프의 4대 장막을 사계절에 걸쳐 낭독연극으로 풀어내는 '사계절 체홉'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봄에 '벚꽃동산'(4월)에 이어 여름에 '바냐 아저씨'(6월 20일)가 무대에 오르고, 가을에 '세자매'(9월 19일)와 겨울에는 '갈매기'(11월 29일)로 이어진다. 마포아트센터 플레이맥에서 공연되며 전석 1만원이다.
'어렵고 딱딱한 체호프는 잊어라'를 내건 이 시리즈는 텍스트를 오늘의 언어로 옮겨 한층 가볍고 유쾌하게 풀어낸 것이 특징으로, 미디어를 통해 친숙한 배우들이 스페셜 캐스트로 함께한다. 2018년 창단한 공놀이클럽은 동시대 청소년의 고민을 유쾌하면서도 서늘하게 그려내는 '영어덜트 연극'을 개척해 온 창작집단으로, 지난해 동아연극상 새개념연극상과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을 받았다. '공놀이하듯 연극한다'는 철학을 내건 강훈구 연출은 마포라는 새 환경에서 연극이 일상 속에서 즐기는 장르로 자리 잡도록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전미도의 정통극 '갈매기'에 이어 11월 공놀이클럽의 낭독극 '갈매기'까지, 한 해에 같은 고전을 두 방식으로 만나는 재미도 있다.
[구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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