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와 기병대 — 왕의 그림을 탐내는 두 지도자[청계천 옆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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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171

미국 독립기념일 250주년을 앞두고 지난 1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차량 행렬 앞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기병대가 나타났습니다. 1898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조직한 의용 기병연대를 재연한 ‘러프 라이더스’입니다. 노스다코타주 루스벨트 도서관 개관식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트럼프는 이날 루스벨트를 “진정한 사나이(great he-man)”로 칭송하며 미국의 부흥을 이끈 지도자를 한껏 치켜세우는 한편, 당시를 회상하게 하는 이미지의 주인공으로 등장했습니다. 건국 125주년 당시 루스벨트를 소환하는 방식으로 건국 250년의 대통령인 트럼프를 같은 반열에 올려 놓으려는 백악관의 계산이었습니다.

1일 미국 노스다코타주를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차량 행렬을 카우보이 모자를 쓴 기마대가 호위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러프 라이더스(Rough Riders)’는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조직한 의용 기병대다. 백악관 X

1일 미국 노스다코타주를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차량 행렬을 카우보이 모자를 쓴 기마대가 호위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러프 라이더스(Rough Riders)’는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조직한 의용 기병대다. 백악관 X
이 장면에서 떠오른 사진이 있습니다. 김정은의 백마입니다.●집권 첫해부터 말 위에 있었던 김정은

북한에서 백마는 소품이 아니라 교리에 가깝습니다. 김일성은 만주 벌판에서 백마를 타고 항일운동을 했다는 그림으로 자신이 ‘혁명 세력’임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다만 그 시절 백마를 탄 사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김정일의 경우는 1963년 4월에 촬영된 승마 사진이 존재하고, ‘장군님 백마 타고 달리신다’는 노래까지 만들어졌습니다.

김정은은 백마 신화에 일찍 등록됐습니다. 집권 직후인 2012년 1월 8일, 북한이 공개한 첫 기록영화에 백마를 탄 김정은이 등장합니다. 그해 11월 20일자 노동신문 1면에는 기마부대 훈련장에서 측근들과 말을 탄 김정은이 실렸습니다. 21세기의 젊은 지도자가 19세기에나 있었을 법한 기마 사열 장면을 연출한 것입니다. 음악과 영상 이미지로 혁명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젊은 지도자를 선대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장치였습니다. 백마의 문법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후 기록영화에서는 리설주 김여정과 현송월을 비롯한 측근들까지 백마를 타고 김정은 뒤를 따라 백두산 자락 개활지를 질주했고, 2023년 열병식에서는 김정은의 ‘전설의 명마’ 뒤를 딸 김주애의 백마가 따랐습니다.

2019년 12월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백마 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백두산 등정 사진. 두 달 새 두 번째 백마 등정이었다. 조선중앙통신=AP 뉴시스

2019년 12월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백마 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백두산 등정 사진. 두 달 새 두 번째 백마 등정이었다. 조선중앙통신=AP 뉴시스

이쯤되면 백마는 북한에서 집요하게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세습의 정당화 도구’입니다. 김정은은 할아버지-아버지에 이은 백두산 혁명 세력의 혈통을 강조하기 위해 말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보도되기 위해 제작된 사건

미국의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Daniel J. Boorstin)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대중매체에 보도되기 위해 만들어지는 사건을 의사사건(pseudo-event)이라고 불렀습니다. 의사사건은 미리 충분히 기획되기 때문에 진짜 사건보다 더 잘 정리되어 있고 더 극적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진짜보다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백마 탄 김정은은 이 개념의 교과서적 사례입니다. 그가 실제로 말을 타며 혁명을 하던 사람인지와 무관하게, 백마 탄 김정은은 신문과 방송에 보도됨으로써 ‘사실’이 됩니다. 노스다코타의 기병대도 정확히 같은 구조입니다.

●대통령이 왜 왕의 그림을 원하는가

말은 오랫동안 왕과 정복자를 상징해 온 동물이며, 기마 초상과 기마상은 군주의 권력과 위엄을 시각적으로 구성하는 대표적 양식입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초상화, 1898년 말 위의 루스벨트 사진도 그 계보에 있습니다.
말을 타는 사진은 선거로 뽑힌 대통령에게는 애초에 필요 없는 그림입니다. 정통성은 투표함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트럼프는 기병대를 앞세웠습니다.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의 이미지를 빌려 자신을 신화의 반열에 올리는 이 연출은, 열병식에 딸의 백마를 세우는 평양의 연출과 구조적으로 같습니다. 국가 서사의 기원을 현재 권력자에게 투영시켜, 역사로 만드는 작업.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세습 독재의 이미지 문법과 같은 지점에 도착한 것은 아닌가요. 누가 누구를 배웠는지 묻는 것이 무례하지 않을 만큼, 트럼프의 사진과 북한의 사진은 닮았습니다.

●그래도 갈리는 지점 — 사진이 아니라 지면

다행히 차이는 남아 있습니다. 사진이 아니라 그 사진이 놓이는 지면입니다. 미국 언론은 이 포토제닉한 장면을 순순히 지면에 받아쓰지 않았습니다. 원래 미국 언론에는 백악관이 SNS로 배포하는 연출 사진을 뉴스 사진으로 쓰지 않으려는 관행이 있습니다.

2026년 7월 1일 미국 노스다코타주 메도라에서 열린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도서관 개관식에서, ‘러프 라이더스’ 재연 기병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AP 뉴시스

2026년 7월 1일 미국 노스다코타주 메도라에서 열린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도서관 개관식에서, ‘러프 라이더스’ 재연 기병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AP 뉴시스

이번에도 화려한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현장을 기록한 통신사 기자는 “재현“이라고 분명하게 표기했고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가 루스벨트를 ‘자신과 동급의 대통령’으로 기리려 한다며 두 사람의 실제 기록이 얼마나 다른지 전문가 진단을 붙였습니다. 뉴스위크는 역사학자들을 인용해, 국립공원을 만들고 2억 에이커가 넘는 공유지를 지킨 ‘보전 대통령’ 루스벨트와 공유지를 개발에 열어주는 트럼프는 정반대라고 짚었습니다. 미국의 환경단체들도 루스벨트 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사진의 가치를 평가절하했습니다. ”늘 시끄럽게 자랑하는 사람보다 더 불쾌한 존재는 드물다.“ 연출은 대통령이 했지만 해석의 권한은 아직 언론과 시민에게 있습니다.
김정은의 백마 사진은 북한 방송과 신문 지면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습니다. 노동신문 바깥에 이 사진을 반박할 공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연출도 해석도 박수도 모두 권력의 몫입니다. 같은 말을 탔지만 미국에서는 검증대에 오르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화를 땅으로 내리는 힘

지도자를 말 위에 올리고 싶은 욕망은 체제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두 사진은 보여줍니다. 다른 것은 그 신화를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 힘이 그 사회에 있느냐 뿐입니다. 같은 사진도 놓이는 지면에 따라 광고가 되기도 하고 뉴스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본 권력의 사진은 어느 쪽이었습니까. 좋은 댓글로 생각을 나눠주세요. 백년사진이었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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