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가까이 가족을 벌어 먹였지만 결말은 허망했다. 2007년 12월 어느 날 송지아 씨는 함북 무산읍에 있는 자신의 집에 조용히 들어섰다. 장사 밑천을 모두 잃은 직후였다. 북한에서 장사가 망하는 이유는 많지만 그중 첫째 이유를 꼽는다면 밑천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날 그는 청진으로 가지고 가던 휘발유 100리터를 당국 단속에 걸려 빼앗겼다. 옥수수 300kg을 바꿀 수 있는 양이었다. 풀죽을 해 먹으면 가족이 반년 이상 먹고살 식량이었다.
장사가 불법인 북한에선 안전부나 보위부 단속반이 눈을 부릅뜨고 사냥거리를 찾는다. 그들은 빼앗아야 먹고살 수 있는 하이에나 떼다. 송 씨도 먹잇감이 됐다. 당국이 공급해 주지도 않는 휘발유이지만 개인이 유통하는 순간 밀거래범이 된다.
집에 들어간 송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을 벗어 벽에 걸고 집에 있는 제일 낡은 옷을 꺼내 입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먼 길 떠날 결심을 하고 나니 괜찮은 옷이라도 두 여동생에게 남겨 두고 싶었다. 유서 쓰는 마음으로 짧은 이별 편지를 적어 걸어 둔 옷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죽지는 않겠지만, 이제 나가면 돌아오진 않을 겁니다.’
그 말은 현실이 됐다. 그는 죽지도 않았지만 돌아가지도 않았다. 아니,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됐다. 고향을 떠나던 그날, 두 볼을 찌르던 북방 찬바람을 여전히 기억한다.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이를 더 깊은 수렁에 밀어 넣는 땅을 27세 처녀는 그렇게 떠났다.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죠. 중국에 오래 있지도 않았고 북송된 적도 없으니까요. 한국에 와서도 거저 주어진 행운은 없었지만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고 있으니까요.”그의 인생엔 많은 탈북민이 겪은 드라마틱한 역경과 고난은 없었다. 대신 ‘북에서 온 이웃’으로 조용히 이 사회에 스며들어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
● ‘하모니카집’ 맏딸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는지가 운명의 5할을 결정하고,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가 운명의 3할을 좌우한다는 연구도 있다. 그게 맞는다면 송 씨는 태어날 때부터 인생의 8할이 이미 꼬여 버렸다. 지구상에서 손꼽히게 가난한 땅에서 태어났고, 그 땅에서도 더 가난한 지역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최악의 기아 참사를 겪어야 했다.1981년 송 씨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함북 무산광산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주변에 친척도 없었다. 자강도 강계에서 맏아들로 태어난 부친은 군복무 10년을 마치자 ‘무리 제대’로 아무 연고도 없는 무산광산에 강제로 발령을 받았다. 무리 제대는 제대한 군인 수백~수천 명을 인력이 부족한 곳에 강제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무산과 강계는 남극과 북극만큼 떨어져 있었다. 기차로 가면 잘 다닐 때도 사나흘씩 가야 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엔 최소 열흘이 걸렸다. 송 씨 모친도 강원도의 한 군수공장에서 일하다가 부친을 만나 결혼한 뒤 무산으로 왔다.송 씨가 태어난 집은 무산에서 ‘천 세대’라고 불리는 ‘하모니카집’ 집단촌이었다. 북한은 1980년대 초반 노천 광산인 무산광산을 확장하면서 수많은 제대 군인을 이곳에 보냈다. 이들이 살 집을 짓기 위해 공동묘지를 밀고 건물 1000세대를 급히 지었다.
한 식구씩 사는 단칸방 4칸이 한 지붕 아래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가 악기 하모니카를 닮았다고 해서 하모니카집이라고 불렸다. 인천 부평구에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일제 징용 흔적인 ‘미쓰비시 줄사택’과 비슷하지만, 이조차도 무산 하모니카집보다는 크다.
옆집 코 고는 소리, 방귀 소리까지 다 들리는 환경에서도 혈기 왕성한 제대 군인 가족 1000세대가 살다 보니 아이들이 쑥쑥 태어났다. 송 씨가 인민학교에 다닐 때 한 학년에 45명 규모 11개 반이 있었다. 송 씨 부모도 자식을 네 명 낳았다.
넓지 않은 하모니카 주택 단지에 수천 명이 살다 보니 흡사 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대부분 다 알았다. 좁은 공터는 연령대 비슷한 아이들로 꽉 찼다. 아침저녁이면 1000개 굴뚝이 내뿜는 연기 때문에 코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 그가 겪은 고난의 행군
1994년부터 하모니카 단지에 고난의 행군 바람이 휘몰아쳤다. 배급이 나오지 않으니 광산 노동자들이 무리로 죽어 나갔다.차라리 서로를 몰랐다면 나았을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정을 나누던 사람들이 관도 없이 땅에 묻혔다. 송 씨도 옆집을 포함해 함께 놀던 친구들의 죽음을 수시로 목격하며 ‘나도 언젠가 저렇게 집에서 뼈만 남은 시체로 나오겠구나’ 하는 공포를 느꼈다.
온 가족이 굶어 죽은 집에 가면 벽에 김 씨 일가 초상화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궁이 가마솥까지 뽑아 팔면서 마지막까지 버틴 것이다. 집에서 팔 수 없는 것은 초상화밖에 없었다.
다행히 송 씨 부모는 굶어 죽은 사람들보단 생활력이 조금 나았다. 부친은 광산에 나가지 않고 산에 올라가 화전을 일구었다. 모친은 중국 상품을 들고 강원도 친정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맏딸 송 씨는 10대 초반부터 부친을 따라 화전에서 농사를 지었고 가을엔 산에 움막을 치고 농작물을 지켰다.
송 씨는 지금도 캠핑이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 움막에서 겁에 질려 밤을 새우던 어릴 때 공포가 떠오른다. 또 비빔밥을 거의 먹지 않는다. 비빔밥만 보면 어려서 먹던 풀죽이 떠오른다. 길을 가다가 “저건 먹는 풀, 저건 못 먹는 풀”하며 저도 모르게 구분하는 자신이 싫다.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은 전교생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송 씨는 그래도 학교에 나가는 학생이었다. 방과 후엔 동생들을 데리고 풀을 뜯으러 다녔다. 먹을 수 있는 풀도 먼 데 있는 산에 가야 뜯을 수 있었다. 고난의 행군 기간은 그의 사춘기와 겹친다. 한창 키가 크고 발육이 될 나이에 먹지 못하니 학생들 평균 키가 10cm 이상 작아졌다.
17세에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송 씨는 3년제 대학인 청진2사범대학에 추천받았다. 이곳을 졸업하면 인민학교나 유치원 교사로 임명된다. 북한에서는 중학교 졸업생 15% 정도만 대학에 간다. 웬만해선 대학 추천을 받기도 쉽지 않다.
송 씨가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학교에 나오지 않는 학생이 태반인 데다 나온 학생들도 공부를 잘하지 않았다. 또 대학 추천을 받은 학생들도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하다 보니 그에게 추천권이 온 것이다.
그의 집이라고 딸을 대학에 보낼 형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는 맏딸만큼은 꼭 대학에 보내고 싶어 했다. 도청 소재지인 청진에 나가 입학시험을 치니 얼마 뒤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다.
● 한 학기를 버틴 대학 생활
어떻게든 3년은 버텨 교사가 되리라던 의지는 입학 한 학기 만에 깨졌다. 대학 기숙사에서 밥을 주지 않아 먹을 것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최소 비용으로 한 달을 먹으려면 ‘속도전가루’ 15kg을 사야 했다. 속도전가루는 옥수수에 높은 압력과 열을 가해 가루로 만든 것으로 물을 부어 비비면 바로 먹을 수 있다.속도전가루조차 충분히 살 돈이 없던 송 씨는 점심시간에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가 많았다. 이겨 내야 할 것이 허기뿐이라면 견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학에서 내라는 각종 비용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교수 식량조차 학생들이 돈을 걷어 보조해 줘야 했다.
송 씨는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연료와 속도전가루 장사였다. 무산광산에서도 조금 힘 있는 사람들은 생산용으로 조금씩 나오는 연료를 빼돌려 청진에 와서 팔면 돈이 남았다.
그 돈으로 속도전가루를 구입해 장마당에서 팔면 어느 정도 이문이 남았다. 17세 여대생이 장마당에 앉아 속도전가루를 파는 게 너무 부끄러웠지만, 굶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버텼다.
하지만 이 삶도 오래가진 않았다. 청진에서 두만강 옆 무산까지 열차가 정상적으로 다니면 2시간 정도 걸렸다. 하지만 전기가 제대로 오지 않으면 기차에서 며칠을 보내야 할지 기약조차 없었다.
장사하러 오가는 사람과 짐으로 열차는 미어터졌다. 객실을 콩나물시루처럼 꽉 채우고도 자리가 없어 열차 지붕에 앉아 가는 사람도 많았다. 먹지 못한 채 지붕에 며칠씩 있다 보면 착시현상도 일어난다. 기차가 달릴 때 부주의하게 허리를 세웠다가 고압선에 닿아 감전돼 죽는 사람도, 터널에 들어갈 때 미처 엎드리지 못해 터널 입구 벽에 부딪쳐 죽는 사람도 많았다.
송 씨도 달리는 열차 지붕에서 떨어졌다. 열차가 흔들렸는지, 급제동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열차 높이와 선로를 받치는 자갈 더미 높이까지 감안하면 4~5m 높이에서, 그것도 달리는데 떨어졌으니 못해도 최소 불구가 돼야 맞겠지만, 정신을 차리니 천만다행으로 물이 고여 있는 진흙탕에 떨어져 큰 부상을 면했다.
하지만 이 일로 혼이 빠져나갔다. 더 이상 장사하며 버틸 자신이 없었다. 한 학기 만에 학업을 그만두었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학기 지나고 나니 지방 출신 학생 태반이 그만두었다. 자퇴 절차 같은 것은 없었다. 대학에 나오지 않으면 그걸로 대학과의 인연은 끝이었다.
● 객화차원으로 새출발
대학은 접었지만 열차를 타고 다니면서 배운 것도 있었다. 철도 신분증이 있으면 안전원들에게 단속되지도 않았고 물건을 빼앗길 우려도 없었다. 철도기관 입사가 목표가 됐다. 열차를 자주 이용하며 알게 된 몇몇 철도원들 도움으로 이듬해 18세에 무산 객화차대에 입사했다.객화차대는 종점인 무산에 들어온 열차를 청소하고 점검하는 일을 했다. 어린 나이에 낡고 더러운 열차를 청소하는 일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대신 보상이 있었다.
북한 열차엔 객화차원 전용 칸이 있다. 언제 고장 날지 모르니 늘 타고 있는 정비원이 머무는 칸이다. 이곳은 열차 안전원들이 거의 단속하지 않았다. 객화차대도 배급을 주지 않는 처지라 직원들이 이 칸을 활용해 장사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객화차원 칸엔 40kg짜리 짐을 10개 정도 실을 수 있었다. 송 씨는 무산과 다른 지역을 다니며 물건을 날랐다. 식량을 싼 곳에서 사서 무산에 가져다 팔고, 무산에서는 중국 물품을 사서 남쪽 지역에 싣고 가 팔았다.
어느새 그가 식구를 먹여 살리는 가장 노릇을 하게 됐다. 가장이 되니 나이가 차도 결혼할 생각을 못했다. 그가 시집을 가면 가족을 먹여 살릴 사람이 없었다. 객화차대에서 2007년까지 일하는 동안 탈북을 원하는 사람 10여 명을 몰래 데리고 무산에 온 적도 있었다.
남쪽 지역 사람들은 탈북하고 싶어도 두만강 지역에 연고가 없어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많다. 국경 지역으로 가려면 빨간 줄이 그어진 특별여행증을 발급받아야 하는데, 그 지역 연고가 없으면 받기 어려웠다.
무산에 도착한다고 해도 국경을 넘는 선을 찾아야 하는데, 거의 매일 진행되는 민가 숙박 검열을 피하기가 어렵다. 운 좋게 피한다고 해도 경비대가 촘촘하게 잠복한 두만강을 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송 씨의 객화차원 칸에 타면 국경에 도착할 때까지 비교적 수월하게 검열을 피할 수가 있었다. 무산에 도착해서도 월경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송 씨는 데려온 사람들을 객화차대 숙소에 머물게 해 숙박 검열을 피했다. 송 씨가 도와서 중국으로 간 사람들 중에 북송된 이도 있었을 테지만 다행히 누구도 송 씨 이름은 불지 않았는지, 그는 조사를 받은 적이 없었다.
2007년 12월 휘발유를 단속에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면 송 씨는 지금도 북에서 열차를 타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단속반 중엔 돈이 필요해 눈이 돌아간 사람이 꼭 있다. 객화차원 칸은 눈감아 주면서 일정한 뇌물을 받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지만 가끔 장사 물품을 통째로 빼앗는 악질적인 단속반원이 나타난다.
객화차원은 을이라 항의할 수가 없다. 단속반원에겐 열차를 더 타지 못하게 하거나 심지어 감옥에 보낼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장사 밑천을 빼앗긴 송 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그 돈을 만들 능력도 없었다. 절망 속에서 그가 택한 길은 탈북이었다.
● 국경경비대원의 조언
낡은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동창생 집으로 향했다. 그 동창은 중국에 건너가 결혼까지 해서 살다가 북송돼 국경경비대와 중국에 아는 선이 있었다. 다시 탈북할 기회만 보고 있던 그 동창은 송 씨에게 흔쾌히 같이 가자고 했다. 탈북할 돈이 없었는데 송 씨를 팔면 자신은 공짜로 묻어 갈 수 있다고 타산한 것이다.둘은 무산을 벗어나 두만강 상류 쪽으로 수십 리 올라갔다. 곳곳에 단속 초소가 있었지만 현지인이라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동창이 아는 국경경비대원이 야간 경비를 설 때 두만강에 나갔다. 상류인 데다 국경경비대만 아는 지점에서 건너니 물이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
경비대원은 떠나는 송 씨에게 “중국 가면 나이를 25세 미만이라고 하세요.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유리하죠”라고 조언해 주었다. 강을 건너니 경비대원과 미리 약속한 중국인들이 나와 있었다. 중국인들이 송 씨와 동창생이 쥐고 온 줄에 비닐로 꽁꽁 싸맨 돈을 묶자 강 건너편 경비대원이 줄을 당겨 가져갔다.
둘은 차를 타고 연길로 들어와 깜깜한 집에 갇혔다. 동창은 중국 남편과 연락이 닿아 이틀 정도 있다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20대 조선족 남성이 찾아와 송 씨를 차에 태웠다. 그가 송 씨를 산 것이었다. 도착한 곳은 이 남자가 아내와 함께 사는 아파트였다.
경비대원 조언대로 25세라고 했다. 도착해 보니 20세~25세 미만 탈북 여성 넷이 있었다. 큰 방에 조선족 부부가 살고, 송 씨는 창문을 가린 다른 방에서 이 여성들과 함께 지냈다. 조선족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한바탕 떠들었다.
“나는 너희를 한족에게 시집보내지도 않을 거고 먹을 것도 충분히 주고 일하면 일한 만큼 대가도 줄 것이다.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을 찾을 순 없을 것이다.”
남성은 밤에 이들을 차에 태우고 식당 서빙을 시켰다. 중국어를 모르니 방에 음식을 가져다주는 일을 했다. 부부는 낮에 외출할 때면 아파트 현관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송 씨는 이 조선족이 왜 젊은 탈북여성을 사 모았는지 모른다. 단순히 식당 종업원 일만 시키려 했을 것 같진 않다. 송 씨는 온 지 한 달도 안 돼 탈출했다.
● 몽골 사막을 넘어 한국으로
다른 여성들과 얼굴을 익혀 친하게 됐을 때 20세인 막내가 말했다.“서빙하다가 한국 사람을 만났어요. 쪽지에 ‘저는 탈북한 사람인데 도와주세요’라고 적어 몰래 주었는데 그가 교회 사람들과 연결시켜 주었어요. 식당에 온 교회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아파트 문을 따준다고 했어요. 그리고 한국에 보내 준다고 했는데, 언니들 생각은 어때요?”
서빙할 때는 보통 조선족이 지키고 서서 손님들과 이야기를 못하도록 감시하는데 막내가 틈을 노려 구조 요청을 한 것이다.
5명 중 3명이 찬성했다. 송 씨를 포함한 두 명은 망설였다. 비록 미래를 알 수 없어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쪽지를 써 놓고 오긴 했지만, 가능하면 돈을 벌어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자 다른 셋이 그들을 설득했다. 북송된 경험이 있던 한 여성은 북에 돌아가면 어떤 비인간적인 처우가 기다리는지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송 씨도 마음이 흔들렸다.
며칠 뒤 조선족 부부가 외출했을 때 교회 사람 몇 명이 정말로 문을 열어 주었다. 다섯 명은 이들이 갖고 온 차를 타고 떠났다.
송 씨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달려 어느 아파트에 들어가니 다른 탈북자 몇 명이 더 있었다. 내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가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몇 명씩 팀을 이루어 내몽골에 건너가면 다음 팀이 떠나는 식이었다. 한국행을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순서가 빨리 오지 않았다.
2009년은 한국에 온 탈북민 수가 정점을 찍은 해였다. 그해에만 2913명이 입국했다. 한 팀이 떠나면 송 씨 일행은 다시 은신처를 옮기며 조금씩 내몽골과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다.
거의 여름이 다 돼서야 송 씨 순서가 왔다. 탈북 여성 5명에 더해 여인과 아이, 노인 부부까지 9명이 안내를 받으며 내몽골 국경을 넘어 몽골 땅에 발을 디뎠다. 철조망을 몇 개 지나니 광활한 사막이 펼쳐졌다. 몽골 국경경비대에 체포되면 된다고 했는데 어디로 가야 경비대가 나타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일행은 무더운 사막을 이틀 반이나 헤맸다. 한참을 걷다 떠난 곳으로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다들 지쳐 더 이상 힘이 없게 되자 어디로 갈지를 두고 내분이 생겼다. 결국 서로 갈라졌다. 송 씨와 함께 도망친 여성 4명은 이쪽으로, 여인과 아이 그리고 노인 부부는 저쪽으로 갔다.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싶은 고비를 몇 번 넘긴 뒤 국경경비대와 조우했다. 경비대 숙소에서 며칠 있다가 다시 울란바토르로 이송됐다. 다른 방향으로 떠난 4명의 운명을 걱정했는데, 그들도 이미 울란바토르에 와 있었다.
열악한 울란바토르 수용소 생활은 6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탈북민 수감자들은 냄새 나는 쌀로 밥을 스스로 지어 먹어야 했다. 싹이 다 난 감자와 양배추가 부식으로 들어왔는데 된장도 없어 맹물에 소금만 쳐서 국을 끓여 먹었다. 물이 귀해 세수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칫솔도 주지 않아 양치질도 못 했다. 주몽골 한국대사관은 이들 처우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는 듯싶었다.
한국에 가는 순서가 어떻게 짜였는지 알 순 없지만, 송 씨는 함께 온 4명보다 두 달 늦게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생전 처음 타 보는 비행기여서 심한 멀미에 시달려 토하느라 언제 인천공항에 착륙했는지도 몰랐다.

● 고난의 정착
남들 다 받는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에 가니 앞서 온 동료들은 이미 사회로 나간 뒤였다. 두 달 먼저 온 차이는 컸다. 송 씨는 하나원을 나가면 서울에서 살고 싶었지만 그의 기수 128명에겐 서울 임대주택이 4채만 나왔다. 그 두 달 전엔 이거소다 많이 나왔다고 들었다.서울을 포기하고 울산에 가겠다고 신청서를 냈다. 울산이 어디 붙었는지도 몰랐다. 일자리가 많은 곳이 어딘지 물으니 울산에 공단이 있어 취업 확률이 높다고 했다. 하지만 울산을 노린 탈북민도 많았는지 추첨에서 떨어졌다. 어디를 다시 신청해야 할지 모르던 차에 담당 선생이 자신이 알아서 넣겠다고 했다.
그에게 광명시가 배당이 됐다. 바로 임대주택이 나오는 것은 아니고 6개월 동안 한 교회에서 마련한 숙소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2009년 2월 하나원을 졸업한 송 씨는 서울 신림동 교회에서 마련한 숙소로 옮겼다. 집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다른 탈북민 5명과 함께 원룸에서 반년을 살았다.
하나원을 나와서 한 첫 번째 일은 세무학원 등록이었다. 자격증이 있어야 취업에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세무회계 자격증을 따고 취업도 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한 퀵서비스 회사에서 세무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찾아가 뽑혔다. 다른 한국 여성도 지원했지만 왜 그가 뽑혔는지 1년쯤 지나 알았다. 당시엔 탈북민을 고용하면 월급의 절반까지 50만 원 한도 내에서 3년 동안 지원하는 고용보험제도가 있었다. 그의 첫 1년간 월급은 100만 원이 되지 않았다. 고용주는 50만 원만 주고 그를 쓸 수 있었다.
회사는 직원이 100명 넘었고 사무실 직원도 20명쯤 됐다. 그곳에서 3년을 일했다. 아니, 버텼다. 회사 특성상 전화받을 일이 많았는데 말투가 이상하다며 온갖 불만이 쏟아졌고, 장난전화도 수시로 걸려 왔다. 먼저 전화하면 보이스피싱이냐며 끊는 사람도 많았다.
말투를 고쳐야겠다고 언어 교정 학원까지 다녔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집으로 받은 광명시 하안동 영구임대주택에서 회사까지 출근 시간도 거의 2시간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해 입국할 때 54kg이던 몸무게가 1년 뒤 44kg로 줄어 영양실조 직전이 됐다. 진짜 고난의 행군인 듯했다.
그럼에도 버틴 이유는 정착지원금 때문이었다. 당시 탈북민은 한 직장에서 3년을 일해야 정착지원금 1800만 원가량을 전액 받을 수 있었다. 도중에 좋은 직장을 알게 돼 이직하면 정착금은 사라졌다.
한국을 전혀 모르는 탈북민이 당장 굶지 않으려고 닥치는 대로 취업한 곳에서 3년 동안 강제로 일하게 만드는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정착금을 많이 주면 브로커들이 뜯어 간다는 이유였는데 탈북민 원성이 커지자 이후엔 3번 정도 회사를 옮겨도 받을 수 있게 바뀌었다.
● 처음 만든 봉사단체
3년 동안 열심히 일해 정착지원금을 다 받자마자 그는 광명시청 임기제 공무원으로 이직했다. 한국 사회를 점점 알게 되면서 더 좋은 직업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정착지원금이란 족쇄 때문에 옮겨갈 수 없었다.2012년 10월 그가 시청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회사에 다니면서 꾸준히 공부해 사회복지사를 비롯한 자격증을 7개나 따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청에서 사회복지 업무를 맡았다.
시청에 입사한 지 한 달 만에 동네 탈북민 다섯 명과 함께 탈북민 집을 청소해 주는 봉사단체를 전국 최초로 만들었다. 자신의 경험이 계기였다. 지금은 탈북민 정착 지원을 돕는 하나센터가 전국에 있어 해당 지역에 오는 탈북민 집을 미리 청소하는 서비스도 제공하지만 당시엔 그런 것이 없었다.
하나원을 나온 지 6개월 만에 21㎡(약 7평) 임대아파트에 입주했을 때 새 삶에 대한 기쁨보다 절망감을 더 크게 느꼈다. 벽지는 곳곳이 찢어져 있었고 온 집안에 담배 냄새가 심하게 배어 있었다. 화장실도 들어가기 끔찍할 정도로 더러웠다.
관리사무소에 벽지라도 새로 해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규정상 5년이 돼야 해 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청소를 도와줄 수 있냐고 했더니 입주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고 했다.
전입신고를 해야 한다고 알려준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야 알고서 전입신고를 하려고 나섰는데 동네 지리를 모르니 코앞에 있는 동사무소(주민센터)를 찾지 못해 몇 시간을 헤매다 다른 동사무소로 찾아가기도 했다.
송 씨는 자신이 겪은 일을 다른 탈북민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후배들은 최소한 집에 신발은 벗고 들어가서 짐을 풀고 첫 밤을 보내게 하고 싶었다.
동네에 사는 탈북민들에게 그런 뜻을 전하니 흔쾌히 그러자고 나섰다. 이후 광명에 오는 탈북민들은 깨끗이 청소된 집에 들어가 첫날을 보낼 수 있었다.
● 평범한 이웃의 조언
광명시청에 입사한 직후 결혼을 해 가정도 꾸렸다. 한 살 위인 남편은 한국에 와서 처음 만난 남자였다. 성수동 회사에 다닐 때 탈북민 조사 용역 업무를 하러 온 남편을 처음 만났다. 한국 사회를 거의 모르는 송 씨가 조언이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요청하다 정이 들었다.연애를 해 본 적이 없기에 연애만 하면 결혼하는 줄 알았다. 지금 돌아보면 결혼하자는 자신의 말에 남편이 머리를 끄덕여 줘서 망정이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을 뻔했다. 2017년엔 딸도 태어났다. 욕심 같아선 아이를 더 많이 키우고 싶었지만 하늘이 한 명만 허락했다.
딸이 태어난 이듬해 경기도 시흥에 있는 10년 공공임대주택 청약에 당첨돼 새집에 이사할 수 있었다. 비록 크지 않고 외진 곳이지만 내 집이 생겨 만족감이 크다. 하지만 이사를 가야 했기에 광명시청에선 더 이상 일하기 어려웠다. 관내 거주자를 우선 고용한다는 암묵적인 규정 때문에 2022년 10월, 근무 10년을 채우고 퇴사해야 했다.
1년도 안 돼 한국교통안전공단 상담원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임기제 공무원과 달리 정년이 보장되는 일자리다.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면접도 4차례나 보는 등 입사 기준이 까다로웠지만 갖고 있던 자격증 7개가 높은 점수를 받는 데 도움이 됐다.
지금도 그는 여러 봉사단체에 가입해 휴일에도 봉사활동에 나선다. 커피 봉사를 하기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 뒤 목감복지관 등에서 노인을 위한 커피 부스도 운영한다. 한국 사회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맞벌이 가족으로 정착했지만 그는 여전히 배워가는 중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많이 배웁니다. 북에서는 가정교육이란 말도, 부모 교육이란 말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아이가 유치원과 학교에 다니면서 인성 교육을 비롯해 이런저런 교육을 받는 것을 보며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도 저런 교육을 일찍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기도 하고,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나니 한국은 잘 될 수밖에 없구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앞으로 무엇을 공부할지도 정했다.
“사회복지 담당 업무를 10년 동안 하면서 탈북민 가정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탈북 여성 혼자 애를 키우며 일을 다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방치돼 분리불안장애를 앓는 자녀가 많습니다. 북에서 선생님이 될 뻔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이런 아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자격증을 따서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16년을 산 그에게 한국에 첫발을 내딛는 탈북민에게 조언을 해 달라고 하자 손사래를 쳤다.
“크게 성공한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것을 이룬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도 꼭 한마디 해 줘야 한다면, 좌절하지 말고 노력하면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망의 바닥까지 갔을지라도 포기하지 말라고요.
그 순간이 지나 나중에 돌아보면 다 나의 뼈와 살이 되는 과정, 면역을 키우는 과정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제가 얻은 삶의 교훈입니다. 앞으로 어떤 시련이 와도 이 고난 뒤엔 어떤 보상이 기다릴까 기대하면서 살아갈 겁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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