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이에 따르면 ‘백학벌의 새봄’이 북한 사회의 부패와 가족 갈등 등을 비교적 솔직하게 묘사하며 인기를 끈 것은 김정은 정권의 달라진 프로파간다 전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즉 정권의 약점으로 보일 수 있는 상황들을 현실에 걸맞게 보여주고, 이를 당이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모습까지 함께 담아내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라는 것이죠.
월스트리트저널 이전에 한국 언론들도 이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고 기사들을 썼습니다. 북한 드라마답지 않게 묘사되는 적나라한 장면이 많다는 것이죠.
집안 급이 맞지 않다고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떠나라고 압박하는 엄마도 등장하고, 뇌물을 주는 장면도 나오며, 남자가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는 것이죠.그래서 이 드라마가 얼마나 파격적인가 궁금해 북한 출신인 기자가 직접 22부까지 다 봤습니다. 요즘은 북한 영화나 드라마를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다 볼 수 있는데, 이 드라마 역시 유튜브에 22부까지 다 올라와 있습니다.
● ‘백학벌의 새봄’을 본 탈북기자의 소감
드라마의 줄거리는 만년 꼴찌 농장으로 전락한 백학리에 새로 부임한 리당비서 형섭이 부정부패와 관료주의에 맞서 고군분투하면서 마을을 사회주의 지상낙원으로 탈바꿈시킨다는 내용입니다. 저의 눈에는 위에서 화제가 됐다는 내용들이 크게 와 닫진 않았습니다. 며느리든 사위든 마음에 들지 않아 집안에서 반대하는 장면은 이전에도 나왔던 것이고, 뇌물 주는 장면이나 남자가 밥하는 장면 등도 크게 파격적이라 보긴 어려웠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봐도 이런 것 때문에 우리 드라마가 달라졌다고 평가하진 않을 듯합니다.
이 드라마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면, 최대 장점은 스토리 구성이 탄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북한 드라마는 너무나 상투적이고 뻔해서 도무지 끝까지 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인간관계의 갈등과 해결 과정을 나름 타당하게 설명하고 있어 끝까지 보는 데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
또 다른 인상적인 부분은 북한 예술 작품들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지겨운 ‘장군님’ 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김정은을 의미하는 ‘총비서 동지’라는 이름은 한 개 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합니다. 다른 드라마였다면 백 번도 넘게 들어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엔 먹을 것이 수없이 등장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친해지러 갈 때도, 사과하러 갈 때도, 청탁하러 갈 때도 늘 손에 뭔가 들고 다닙니다. 닭고기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10부쯤 봤을 때, 이제 저 사람은 손에 닭백숙 그릇을 들고 가겠구나 싶은 전개가 상상이 됩니다. 아마 북한 주민들이 봤을 때 제일 어처구니없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드라마처럼 살려면 집에 닭을 100마리는 키워야 할 겁니다.
또 하나 북한 주민들이 혀를 찰 대목은 백학 농장은 완전히 ‘맥가이버’ 농장이라는 것입니다. 당비서가 새로 부임한 이후 일개 농장에선 못 하는 것이 없습니다. 농촌학교 학생들이 비료를 살포하는 드론도 척척 만들고, 농민이 농기계를 업그레이드하고, 비료 공장도 세웁니다. 새로운 영농법들도 이 농장에서 완성합니다.
국가가 완성해 전국에 일반화해야 할 부분들을 개별 농장에 전가한 것입니다. 이걸 따라 배우라고 하면 북한의 수천 개 농장에서 수천 개의 농법이 나올 것 같고, 별 이상한 농기계들이 다 만들어질 것 같고, 수천 가지 드론이 나올 듯합니다.아마 주민들은 드라마를 관람하면서 “저걸 자력갱생이란 이름으로 우리보고 다 만들라고?”라며 혀를 찰 것입니다. 드라마 내용대로라면 당 일꾼만 있으면 되지 김정은은 왜 있어야 하고, 노동당 농업 부서들은 왜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당 간부가 너무 수다스러워 졌습니다. 기존 영화나 드라마의 당 일꾼은 무게를 딱 잡고, 한 마디 한 마디 묵직한 발언을 합니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에선 시시콜콜 지시하는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올해 초 김정은이 직접 지도해 만들었다는 ‘72시간’이란 영화에 등장하는 김일성도 너무 수다스럽게 모든 일에 참견하던데, 이건 김정은의 성향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단, 여기까지의 드라마 감상평은 오늘 제가 전달하려는 핵심이 아닙니다.
● 지독한 여성 혐오
핵심은 제가 이 드라마에서 지독한 여성 혐오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당연한 듯이 생각하고 별로 거부감이 없이 보겠지만, 만약 이 드라마를 한국 여성들이 보면 당장 북한을 해방하고 싶은 충동이 불끈 솟구칠 겁니다.
밖에 나가선 나무랄 데 없고, 농장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주인공 당 비서도 집에 들어오면 폭군이 따로 없습니다.
군당 간부에서 농장 간부로 부임하게 되자, 군 병원 의사인 아내와, 좋은 학교에 다니던 아내를 강제로 농장에 데려와 좁은 단칸방에 처넣고 농장 병원 의사, 농촌학교 학생으로 만듭니다. 아내나 아들의 불만 따윈 가볍게 눌러버립니다. 나중에 아들이 평양의대에 갈 수 있었었지만, 농촌학교 교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며 해주사범대학에 강제로 보냅니다.
아내의 불만이나 조언엔 “참견질 말고 밥이나 하라”는 핀잔을 주기 일쑤입니다. 집에서 제일 비싼 재산인 오토바이도 한마디 상의도 없이 농민들을 위한 염소 수십 마리와 바꿔옵니다. 한국에서 이렇게 살면 당장 집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당 비서의 상사인 군당 책임비서는 평양에서 김형직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개의 외국어까지 하는 재원인 예쁜 외동딸을 강제로 농촌학교 교사로 보냅니다. 딸은 책임비서의 부속물쯤 되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부정적인 인물들도 알고 보면 다 여자 때문에 망하는 것으로 설정됩니다. 주인공의 형인 군당 농업부장도 아내가 국가 식량을 빼돌려 잘 살자고 부채질하는 바람에 변질돼 나중에 아내와 함께 법적 처벌을 받습니다. 농장 기사장도 자본주의에 물들어 몰래 장사를 하는 아내 때문에 기가 죽어 일을 잘 못합니다. 농장에서 제일 불평이 많은 인물도 여성입니다.
드라마는 수없이 무언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남자가 당에 충성을 다하고, 큰일을 하려면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 여자 말을 따르면 패가망신한다”라고 말입니다. 아예 드라마에 “여자들이야 남자를 잘 만나야 되지 뭐”라는 노골적인 대사도 여러 번 나옵니다.
기자는 가부장적인 북한에서 태어나 20대 중반까지 살았고, 다시 한국에서 23년 동안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서울 물이 진하게 들었지만, 몸의 어느 구석엔 가부장적인 사회의 흔적도 남아있습니다. 그런 저도 드라마를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20년이 지났어도 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어쩌면 더 심해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북한이 정말 큰마음을 먹고 어쩌다 만든 드라마인지라 김정은의 수많은 ‘창작지도’를 받았을 겁니다. 그러니 유럽에서 살았던 김정은도 드라마의 진짜 문제가 뭔지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겠죠.
늘 딸 김주애를 끼고 다녀도, 김정은 역시 집에 가면 북한 ‘상남자’의 태도가 나오겠죠. 아내 이설주가 직접 밥이야 하지 않겠으니 “잔소리 말고 밥이나 하라”는 말은 듣지 않겠지만, 대신 찍소리 못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북한의 가부장적인 문화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이 드라마를 보고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 지독한 성비 불균형
그런데 북한은 왜 그리 가부장적인 사회가 됐을까요.
사회주의 체제가 미친 영향은 크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면 이웃 중국만 해도 사회주의 체제이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더 클 때가 대부분이죠.
이에 대한 연구도 별로 본 적이 없어, 개인적으로 많은 고민을 해본 결과 제일 큰 문제는 ‘성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북한처럼 사회주의 체제였던 러시아나 중국을 사례로 봅시다. 러시아 남성들은 대개 여성에게 잘 대해주지 않는다고 알려졌습니다. 반면 중국은 그 반대입니다.
두 나라의 성비 차이는 뚜렷하게 대조적입니다. 러시아의 성비는 남성 86 대 여성 100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비가 불균형한 이유는 러시아 남성들이 일찍 죽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평균 수명은 남성 68.2세, 여성 78세입니다. 30세 미만에서 성비 불균형은 거의 없지만, 이후 음주나 전쟁으로 남자가 많이 죽다 보니 성비가 급격히 깨지죠.
중국은 심각한 남초(男超) 국가입니다. 중국은 오랫동안 한 자녀 정책을 폈고, 남아선호사상이 높아 전체 인구에서 남성이 51.24%, 여성이 48.76%를 차지합니다. 큰 차이 같지는 않지만, 중국의 전체 인구가 14억1000만 명임을 감안하면 남성이 3500만 명 정도 많습니다.
특히 1980년부터 2021년까지 출생 인구 7억9900만 명의 연간 평균 출생 성비는 114.4였는데, 2002년부터 2008년 사이엔 남아 118명당 여아 100명이 태어났습니다. 중국에서 장가를 가려면 여성에게 잘해야 할 수밖에 없고 여성의 목소리도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럼 북한은 어떨까요. 북한은 러시아보다 더 성비가 불균형합니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수많은 남성이 죽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북한도 6·25전쟁 3년 동안 많은 남성이 죽었습니다. 전후 남성이 귀해지니 몸값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이젠 전쟁이 끝난 지 73년이나 지났으니 성비 불균형이 정상으로 돌아오기엔 충분한 시간이죠. 이미 한국은 2023년 기준 성비가 100.0으로, 남성과 여성 인구가 거의 동일합니다.
하지만, 북한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남성이 일찍 죽습니다. 평균 수명이 길지 않습니다. 유엔에선 북한 남성의 평균 수명을 71세, 여성은 76세로 보지만, 직접 들어가 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통계입니다.
북한 남성은 일찍 죽습니다. 17세에 군에 가서 10년씩 복무하다 보면, 굶어 죽고, 사고로 죽고 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생계 현장이나 근로 현장에서도 안전 장비가 제대로 없어 사고로 많이 죽는데, 위험한 일들은 대개 남성이 하다가 죽습니다. 이렇게 죽는 청년들은 평균 수명 통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 일찍 죽는 북한 남성들
여기에 검증할 수 있는 확실한 통계 하나가 있습니다. 2005년에 작성된 ‘평양 주민자료’가 2011년 국내 한 언론에 입수된 적이 있습니다. 북한 보위부가 평양에 거주하는 17세 이상 성인 남녀 210만8032명의 자세한 신상정보를 담아 작성한 파일이 통째로 한국에 넘어온 것이죠.
기자가 평양에 살고 있는 여러 지인의 이름을 넣고 검색한 결과 확실한 내부 문건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이 파일을 돈을 받고 판 내부자는 나중에 색출돼 처형됐다고 합니다.
이 자료를 분석한 결과 평양은 ‘여초(女超)’ 도시였습니다. 평양의 성인 인구 210만여 명 중 여성은 122만여 명인 데 반해 남성은 87만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성비를 따지면 여성 100명에 남자는 71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문건에 김 씨 일가를 포함한 약 1만 명의 고위층 정보, 평양에 근무하는 군인 신상은 담기지 않았음을 감안해도 성비가 심각하게 불균형을 이룹니다.
해외에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고, 북한 내부에서도 평양과 지방은 엄격하게 격리돼 있으니 이런 불균형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남쪽에서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 왜 길거리에 조선옷을 입은 여성들만 몰려나와 열심히 꽃을 흔들고 있는지 이해가 될 겁니다.
평양은 북한 사회의 표본입니다. 남성들이 죽을 위험에 훨씬 더 노출된 지방은 평양보다 성비가 더 불균형하겠죠.
즉, 결론을 말한다면 북한 남성은 일찍 죽습니다. 대신 죽기 전엔 여성들에게 큰소리를 실컷 치다가 죽습니다. 북한의 가부장적인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 환경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엔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참전해 젊은 남성들이 죽고 있는데, 노동당에선 젊은 남성에게 “당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치라”고 교육을 합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백학벌의 새봄에서 묘사되는 여성 혐오가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통일되면 빠르게 바뀔 문화
그렇다면 북한의 가부장적인 문화는 언제 바뀔까요.
저는 북한에서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면 이런 문화는 순식간에 바뀔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탈북한 사람을 잡아서 처벌하는 권위주의 체제가 없어지면, 가난한 땅에 남아있고 싶은 북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중국에서 잡아 북송해도, 고향에 가서 어차피 처벌되지 않으니 성공할 때까지 탈출을 시도하고 또 시도하겠죠.
중국에서 살기 어려우면 중국을 거쳐 잘 사는 외국에 필사적으로 나가려 하겠죠. 기마 민족의 피가 흐르고, 척박한 땅에서 억척스럽게 생존한 북한 사람들은 탈출에 필요한 내공이 상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당연히 한국에도 많이 올 겁니다.
그런데 해외에선 여성의 경쟁력이 훨씬 더 높습니다. 바로 이웃 중국에만 해도 짝을 찾을 수 없는 남성이 3500만 명이나 있으니까요.
2024년 말 기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3만4314명 중 여성은 2만4746명이고 남성은 9568명입니다. 여성 100명당 남성 38.7명으로, 입국자의 72.19%가 여성입니다.
북한 여성들이 해외에 나가 자리 잡는 비율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북한엔 남성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어쩌면 몇 년 만에 장가를 갈 수 없다고 아우성칠지 모릅니다. 그러면 북한 남성들은 러시아처럼 살다가 순식간에 중국처럼 문화가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북한의 가부장적인 문화에 대해 남쪽에서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통일이 되면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아이를 봐주고, 그것도 모자라 아내의 기분이 좋아지라고 발까지 씻어주는 북한 남성들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