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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서를 내면 실업급여를 받게 해주겠다”는 말에 사표를 제출한 근로자가 실업급여 부정수급을 이유로 기소됐지만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형식은 자진 퇴사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용자의 해고였다는 이유에서다.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해 근로자 권리를 보호한 결정이지만 일각에서는 자칫 실업급여 제도를 악용한 이른바 ‘꼼수 퇴사’에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북부지방법원은 최근 회사측과 짜고 자진 퇴사를 했으면서도 고용보험 상실 사유를 '경영상 해고'로 허위 기재하고 실업급여를 부정수급한 혐의(고용보험법 위반)로 기소된 피고인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주식회사 F는 2024년 7월 13일 직원 A씨에게 '배송 후 늦장 귀사를 사유로 해고예고기간 이후인 2024년 9월 27일자로 A를 해고한다'는 내용의 해고예고통보서를 문자메시지로 발송하고 즉각 연차휴가를 부여했다. 이에 A는 그 다음 날부터 출근하지 않았다.
이후 회사의 담당 부장은 4일 후인 18일 A씨에게 "일신상 이유로 사직한다는 사직서를 회사에 방문해 작성하고, 회장님께 인사드리고 마무리 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사직서를 작성해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해 줄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취지로 수차례 말하며 사직서 제출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결국 A씨는 회사에 방문해 예정된 해고예고기간 종료일 보다 빠른 7월 31일자로 사직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A씨는 2024년 8월 서울 북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경영상 권고사직'을 이유로 실업급여를 신청했고 실업급여 8일분 52만8000원을 수급했다.
이 사실이 적발된 A씨는 회사와 공모해 허위 퇴사 사유를 기재해 실업급여를 부정 수급한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법원은 A씨의 퇴사가 실질적으로 해고라며 실업급여 수급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사직의 형식을 취해 근로계약 관계를 종료시킨 것이라 할지라도, 사직 의사가 없는 근로자로 하여금 어쩔수 없이 사직서를 작성·제출하게 한 경우엔 실질적으로 사용자의 일방적 의사에 의하여 근로계약관계를 종료시키는 것이어서 해고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A씨와 위 회사 사이의 근로계약관계 종료 여부는 사용자 측의 일방적 의사에 의해 결정됐고, 다만 그 종료일을 앞당기는 과정에서 사용자측 권유에 따라 위 사직서가 작성·제출된 것"이라며 "실질적으로 해고를 당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법원은 "위 회사를 자진퇴사했기에 실업급여를 수급할 자격이 없는데 부정 수급했다는 점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A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일부 사용자들은 해고에 따른 부담(부당해고 구제신청 등)을 피하기 위해 실업급여를 수급해주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근로자에게 자진 퇴사를 종용하는 경우가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이 자칫 근로자가 사용자와 공모해 부당하게 실업급여를 수급하려는 시도에 면죄부를 준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정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실업급여 부정수급 여부를 판단할 때 표면적인 서류뿐 아니라 퇴사 과정 전반의 실질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는 취지의 판결"이라며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 보호와 고용보험 제도의 건전성 유지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