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산맥이나 갈라진 땅,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미세한 흙 알갱이 사이에 물감이 흘러내린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그림손에서 '흙의 작가'로 알려진 채성필의 개인전 '흙, 물 그리고 시간의 묘법'이 열리고 있다. 작가는 흙과 물, 중력과 시간으로 완성된 회화 세계를 선보인다.
작가는 흙을 물에 개어 만든 천연 안료를 화면 위에 뿌린 뒤, 캔버스를 세워 물을 분사한다. 중력에 따라 물길이 흐르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이를 인위적인 기법이 아니라 자연의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캔버스의 각도를 조절하며 흐름에 개입하지만, 물질이 흐르고 스며들고 마르는 과정에서 우연히 화면을 완성한다.
이 같은 작업은 대학 시절 여행 중 스케치북만 들고 물가에 갔던 경험에서 출발했다. 그는 "붓과 물감이 없어 풀과 갈대를 엮어 붓으로 쓰고, 물에 젖은 흙으로 그린 것이 흙 작업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에게 흙은 먹과 같은 본질적 재료로 다가왔다. 작가는 여행지에서 흙을 모은다. 흙에 물을 섞은 뒤 미세한 입자만 걸러내 천연안료를 만든다. 흙의 색과 입자, 물의 흐름이 더해지면서 작품마다 서로 다른 흔적이 생긴다. 작가는 물질의 움직임을 활용해 자연의 생성 과정을 회화 안에 담아낸다.
이번 신작 연작의 제목은 '묘법'(Inscription·새김)이다. 단색화 거장 박서보의 연작 '묘법'(Ecriture)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박서보의 묘법을 의도하거나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은 아니다"며 "그림 속 안료가 땅을 새기고 지나가는 흔적과 같다고 생각해서 영어로 Inscription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밝혔다. 전시는 11월 16일까지.
[정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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