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전 장기화에 유럽 ‘친서방 vs 친러시아’ 재편
헝가리, 16년 만에 친러 정권 끝… 아르메니아-발트 3국, 친서방 행보
발칸반도엔 친러 정치인들 휩쓸어… “우크라 지원 반대” “반EU” 주장
전문가들 “유럽 결속 약화 우려… 새로운 냉전 장기화될 가능성”

반면, 세르비아에 이어 유럽연합(EU)에 소속된 루마니아, 불가리아는 친러 대열에 동참하고 나섰다. 이들은 경제적 실익을 내세워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하고, 대러 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대(對)러 노선을 둘러싼 동유럽 및 북유럽 내 분열상을 놓고 ‘새로운 냉전’이 시작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 헝가리, 16년 만에 친서방 정권… 대러 정책 급변경

올 4월 헝가리 총선에선 머저르 총리가 이끈 중도 우파 성향의 신생 정당 ‘티서(TISZA)’가 총 199석 중 141석을 차지해 개헌선(133석)을 넘는 압승을 거뒀다. 머저르 총리는 지난달 9일 취임 첫날 의회 건물에 EU 깃발을 내걸며 ‘유럽으로 복귀’도 공식화했다. 2010년부터 집권해 온 오르반 전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공개 지지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참패했다. 그는 올 2월 EU의 900억 유로(약 153조 원) 규모의 우크라이나 지원 패키지를 가로막아 유럽 각국의 강한 반발을 사는 등 노골적인 친러 행보를 보였다.
새 헝가리 정부는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던 기존 외교 노선에서 탈피해 투명하고 대등한 관계를 재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일성으로 머저르 총리는 지난달 22일 오르반 전 총리가 추진해 온 국제형사재판소(ICC) 탈퇴 결정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전쟁범죄 혐의로 ICC의 체포영장이 발부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헝가리 방문이 어려워질 전망이다. 머저르 총리는 전 정부에서 임명된 슈요크 터마시 헝가리 대통령을 해임하기 위한 법적 절차를 시작하겠다고도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반유럽 블록을 형성하는 데 앞장서 온 헝가리가 다시 유럽 품으로 돌아온 데 대해 서방 진영이 안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 아르메니아도 친서방 급선회… 러 반발
특히 발트 3국은 지난해 6월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에 발맞춰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의 국방비 지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해 발트 3국 국방장관들은 미국 전쟁부(국방부)를 방문해 세계질서를 위한 미국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또 향후 방위비를 늘려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오랫동안 러시아의 핵심 우방국으로 분류돼 온 아르메니아도 최근 러시아와 거리를 두며 유럽, 미국과의 관계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오랜 기간 영토 갈등을 빚어 온 이웃 국가 아제르바이잔과 2023년 충돌할 당시,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에 유리한 중재로 일관했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이에 지난해 러시아가 주도하는 옛 소련권 안보협력체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참여를 중단한 데 이어 EU 가입 의사를 공식화했다. 7일 총선을 앞두고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친서방 중심의 다변화 외교정책도 발표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트루스소셜에 파시냔 총리를 “위대한 친구 겸 지도자”라고 치켜세우며 “(총선에서) 그를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썼다. 동유럽권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노린 포석으로 풀이된다. 자신의 세력권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의 급작스러운 친서방 행보에 러시아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러시아 외교부는 최근 아르메니아 주재 자국 대사를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푸틴 대통령도 “아르메니아가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를 싼 가격에 공급받지 못한다면 GDP가 14%나 줄어들 것”이라며 “이것은 우크라이나 위기가 시작된 방식과 똑같다”고 경고했다.● 친러-반EU 성향 짙어진 발칸반도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맞서기보다 반대로 편승하는 전략을 취하는 동유럽 국가들도 있다. 흑해를 끼고 러시아와 마주하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선 친러 세력이 부상하고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두 국가 모두 EU 회원국임에도 장기간의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으로 정치 지형이 바뀌고 있다고 분석했다.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물가 상승률은 EU 평균(2.5%)을 크게 웃도는 3.5%와 6.8%를 각각 기록했다. 이처럼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자 포퓰리즘 정당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


세르비아도 친중·친러 노선을 강화하고 있다. 서방과 대립각을 세워 온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지난해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전승 80주년 열병식에 참석한 데 이어 지난달 24∼28일 중국을 국빈 방문했다. 1999년 코소보와 전쟁을 벌인 세르비아는 중국 및 러시아산 군사장비를 도입해 왔다. 세르비아는 EU 가입을 희망해 2012년 EU 가입 후보국 지위를 부여받았지만, 2014년 부치치 대통령이 총리로 취임한 뒤로 EU와의 협상은 사실상 교착 상태다.
● 친러 세력, 경제 실익 앞세워 동유럽 공략
그러나 이 국가들은 자동차를 중심으로 제조업 기반이 비교적 튼튼한 헝가리와 달리 EU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오르반 전 총리의 전철을 밟기는 어렵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망했다. EU가 지급하는 각종 지원금 혜택 등을 감안해 지속적으로 반기를 들긴 힘들 거라는 얘기다. 불가리아는 올 초 유로존에 가입하며 EU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한층 높아졌다.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팔면서 방위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기도 하다. 이에 라데프 총리가 EU 잔류를 약속한 것을 두고 현실적 타협점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루마니아에서도 시미온 대표가 당장 정권을 잡기는 어렵다. 대통령 선거는 2030년에야 치러지고, 단 대통령은 “시미온을 총리로 지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총리가 되기 위해 대통령 지명이 필요한 루마니아 정치 제도상 그의 집권은 당장엔 힘든 것. 그러나 정국 불안이 길어지면 2028년 총선과 2030년 대선에서 친EU 성향의 집권 여당이 밀려날 수도 있다.
친러 정치세력들이 오르반 전 총리와 달리 대놓고 친러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이념이 아닌 경제적 실익을 명분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중단, 대러 제재 해제 등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 같은 ‘현실주의’ 노선은 유권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트 피초 총리, 체코의 안드레이 바비시 총리 등 EU 내 다른 친러 성향 지도자들도 비슷한 전략을 취하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은 “일부 EU 회원국이 추진하는 러시아와의 거래적 외교관계는 그 자체로 EU의 결속력에 균열을 일으킨다”며 “오르반은 사라졌지만 중부 및 동유럽에는 여전히 푸틴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지도자가 많다”고 평가했다.
● 우크라전 장기화까지 더해져 유럽 분열 심화
동유럽 및 북유럽에서 러시아를 둘러싼 분열상을 두고 ‘새로운 냉전’의 서막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러시아 전문가 유진 루머 수석연구원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출구를 찾지 못하고, 서로 극심한 적대감을 품은 채 전쟁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어 “나토, EU, 러시아도 새로운 냉전 국면에 접어들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친러 혹은 친서방 진영 내에서도 전쟁 지속을 주장하는 강경파와 타협을 모색하는 실리파가 대립하며 분열이 심화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캐나다 맥길대의 디틀린트 스톨레 교수(정치학)는 캐나다 폴리시 매거진 기고문을 통해 “유럽인들에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더 이상 외교 정책 문제가 아닌 국내 정치 이슈가 됐다”며 “유럽 국가 내 여론이 친러 혹은 반러를 놓고 갈라지고 있으며 정당도 이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탈리아 싱크탱크 유럽대학연구소(EUI)가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연 1회씩 총 8차례에 걸쳐 유럽인 약 14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대러 관계 설정 방향에 대해 소속국마다 제각각의 답변을 내놨다. 핀란드와 스웨덴 국민 다수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유럽이 함께 대응해야 한다고 봤지만, 그리스와 불가리아 국민들은 러시아를 달래는 데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스톨레 교수는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과 맞물려 유럽 내 분열 양상이 장기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규영 기자 kyu0@donga.com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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