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삼키는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식재료의 탄생과 변화, 맛에 얽힌 기억과 감정들을 들여다봅니다.
“곧 ‘K숙취템’이 뜰 겁니다.”
이달 17일 서울 강남구 지하철2호선 강남역 인근의 한 편의점. 계산대 바로 맞은편 진열대를 바라보며 이해성 ㈜황후바이오 대표가 말했다. 편의점 ‘명당’ 자리인 그곳에는 10여 종의 숙취해소제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컨디션’ ‘상쾌환’ ‘모닝케어’ ‘여명’…. 1, 2, 3열의 대기업과 중견기업 제품을 지나 5열에 이르니 주황색 뚜껑이 눈에 띈다. 해외 패션 명품 브랜드 대표 색을 본떠 디자인했다는 ‘슬기로운 간 생활(슬간생)’이다. 이 대표는 “K팝을 필두로 한류 기세가 대단한데, 숙취해소제도 해외에서 날아오를 조짐이 보인다. 이태원, 성수, 강남역 등지의 외국인에게 적극적으로 ‘슬간생’을 홍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숙취해소제 시장은 최근 격변기를 맞았다.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도입한 숙취해소 실증제도 때문이다. 그간 숙취해소제는 검증된 성분을 배합해 제품을 만든 뒤 마케팅 중심 경쟁을 해 왔다.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 인체 적용 시험으로 효능을 증명해야만 ‘숙취 해소’ 문구를 달 수 있다.업계 관계자들은 “숙취해소제 시장은 위기에 처한 동시에 기회의 문 앞에 서 있다”고 입을 모았다. 주류 소비 감소와 실증제 도입은 악재이지만 한류 열풍으로 글로벌 시장의 문이 열렸다는 것. 대형 제약사와 식품기업 틈바구니에서 7년간 시장을 지켜 온 이 대표와 이날 하루 동행하며 시험대에 오른 시장 분위기를 살펴봤다.

맛-제형-효능의 각축장
한국은 자타 공인 숙취해소제 선도국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 5년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숙취해소 제품을 출시했다. 알코올 해독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동양인의 특성과 짧은 시간에 몰아 마시는 회식 문화가 결합한 결과다.한국 전통 해장 문화는 뜨끈한 국물이다. 술 마신 다음날 콩나물국이나 북엇국으로 속을 달랜다. 국내 첫 숙취해소 음료는 음주 문화 변화와 편의성에 대한 수요가 맞물리며 1992년 등장했다. CJ제일제당(현 HK이노엔)은 쌀눈 추출물을 주성분으로 한 제품 컨디션을 출시하며 ‘숙취해소제=드링크’라는 공식을 세웠다.컨디션의 독주 속에서 1998년 ‘여명808’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회장이 직접 자신의 사진을 제품에 내세우는 마케팅과 천연 성분을 앞세워 애주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다. 2005년에는 동아제약이 ‘모닝케어’를 출시하며 시장은 ‘빅3’ 체제로 재편됐다.
2010년 이후엔 액상 드링크 공식이 깨졌다. 삼양사는 2013년 효모 추출물을 농축한 ‘상쾌환’을 출시했다. 작은 구슬 모양 제형(劑形)은 젊은 세대의 ‘파우치 아이템’으로 각광받았다. 2020년대에는 젤리 제형 제품이 출시되며 편의점 매대 중심 자리를 꿰찼다.

단 10%만 편의점 매대에 오른다
현재 시장은 맛, 제형, 효능의 전쟁터다. 크고 작은 기업이 음료, 환, 스틱, 젤리, 캔디 등 개성이 뚜렷한 제품을 내놓으며 경쟁하고 있다. 글루타치온, 커큐민, 홍삼, 효소 등 함유 성분도 다양해졌다.편의점 매대는 이 각축전의 축소판이다. 지난해와 올해 식약처 실증제를 통과한 제품은 모두 105개. 이 가운데 편의점 3사(세븐일레븐, GS25, CU)에 입점한 제품은 20% 정도다. 이마저 대부분 대형 제약사나 식품기업 제품이다. 나머지는 온라인에서 유통된다.
언론계에서 일하다 10년 전 황후바이오로 자리를 옮긴 이 대표는 2019년 숙취해소제 사업을 시작했다. 의사가 참여해 진생베리(인삼열매)와 헛개나무 등을 ‘황금비율’로 배합한 제품을 개발했다. 숙취 주범인 아세트알데히드를 빠르게 분해한다는 효능을 수치로 입증했지만, 철옹성 같은 유통망이 문제였다. 홍보차 제품을 건네면 쓰레기통에 슬쩍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부 대박 사례도 있지만, 대다수 중소기업은 온라인에서 1, 2년 버티다가 제품 출시를 그만둔다. 이 대표는 편의점과 약국 등을 포기할 수 없었다. 오프라인 유통망이 브랜드 인지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문전박대, 삼고초려, ‘맨땅에 헤딩’으로 하루하루 보내길 4년, 기적처럼 세븐일레븐과 일부 약국에 제품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숙취해소제 시장을 ‘인지도 싸움’이라 부른다. 성분 차이와 효능이 뚜렷하지 않은 제품 특성상 소비자가 망설임 없이 손을 뻗게 하려면 1~2년간 지속적인 광고와 마케팅 투자가 필수적이다.이 대표는 이른바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제품을 알리고 있다. 매일 3시간씩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게시물을 올리고 서울과 경기 지역 편의점을 순회한다. 강원 부산 울산 군산 지방에도 1년에 4번은 간다. 그는 “제품 개발 이외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케팅과 제품 배달은 직접 한다. 유흥가 주변 편의점에 들러 제품을 사면서 ‘슬간생 만든 사람이다.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하고, 용달차를 불러 직접 제품을 배달한다”고 했다.

‘KGB 비밀병기’부터 ‘해장 아이스크림’까지
숙취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세트알데히드다. 알코올이 체내에 흡수돼 간에서 분해될 때 생기는 맹독성 물질이다. 숙취해소제는 아세트알데히드를 몸에서 내쫓도록 돕는 역할이 핵심이다. 숙취해소제 제품의 단골 성분인 헛개나무 추출물, 효모, 커큐민 등은 간 기능 보호와 알코올 분해 촉진에 효과적이다.실증제 도입 전까지는 임상 근거가 없는 제품들도 시중에서 팔렸다. 자연히 시장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효능보다 마케팅 경쟁에 집중했다. A 제품은 일명 ‘KGB 약’으로 불리며 폭발적 관심을 모았다. 옛 소련 스파이들이 취하지 않기 위해 먹었다는 이른바 첩보 마케팅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실상은 옛 소련 과학자들이 이 제품 연구에 참여한 것뿐이라는 게 정설로 통한다.
1000번에 가까운 셀프 실험으로 개발했다는 B 제품, 동글동글한 환 제형으로 돌풍을 일으킨 C 제품, 제품명을 패러디해 ‘견디라’는 메시지를 전한 D 제품 등도 대표적인 스토리텔링 마케팅 사례로 꼽힌다. 헛개나무 추출물을 섞은 해장 커피와 해장 아이스크림도 출시됐다. 이 대표도 술에 취한 좀비가 ‘슬간생’을 입에 물고 사람으로 변하는 TV 광고를 찍었다. 반전 이야기로 회심의 한 방을 노렸지만, 광고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송출되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식약처 지침에 따라 과학적 근거가 중요해졌다. 임상 시험 참여자들에게 소주를 마시게 하고 시간대별로 피를 뽑아 측정한 수치가 적정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임상 시험 지원자들의 사전 주량 파악은 필수. 임상 결과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제품 레시피를 갈아엎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 대표는 “인체 적용 시험에는 비용이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 든다. 슬간생은 이 시험에서 효능을 입증했지만, 실증 절차를 포기하고 제품 광고 문구를 수정하는(예를 들어 ‘숙취해소’ 문구 삭제) 중소기업이 적지 않다”고 했다.

숙취해소제 시장도 MZ가 대세
국내 주류 소비량은 감소 추세다. 국세통계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희석식 소주와 맥주 출고량은 전년 대비 각각 3.4%, 3.0% 줄었다. 그럼에도 숙취해소제 시장은 커지고 있다. 올해 국내 숙취해소제 시장 규모는 약 37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며 2032년에는 1조7000억 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술은 덜 마시지만 숙취해소제 소비는 늘어나는 현상은 2030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MZ세대에게 숙취해소제를 주고받는 것은 서로의 건강을 챙기는 술자리 에티켓으로 통한다. 숙취해소제를 구매한 20대 비중은 2023년 39%에서 올해 45%로 늘었다. 반면 30대~50대 비중은 소폭 줄어들었다.
해외 시장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민텔은 최근 “한류 인기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K숙취해소제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글로벌마켓인사이트(GMI)에 따르면 세계 숙취해소제 시장은 2023년 약 2조3000억 원 규모에서 2032년 약 9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슬간생은 태국 카자흐스탄 몽골 일본 등 K컬처에 친숙한 국가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이 대표는 “이태원, 성수, 강남역 등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숙취해소제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청담 ‘아르쥬’ 같은 클럽에 대한 협찬과 외국인 대상 홍보를 계속해 접점을 넓히고 있다”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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