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이데일리가 대한민국 스포츠의 미래를 고민합니다. 젊고 유망한 연구자들이 현장의 문제를 날카롭게 진단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합니다. 변화의 목소리가 만드는 스포츠의 밝은 내일을 칼럼에서 만나보세요. 이미지=퍼플렉시티 AI 생성
스포츠 중계권이 OTT 플랫폼을 넘어간 사례는 야구뿐만이 아니다. 올해 3월 쿠팡플레이가 2025~26 시즌부터 6년간 총 4200억원에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독점 중계권을 확보했다. 축구팬들 앞에는 세 가지 선택지가 놓였다. 쿠팡 와우 멤버십 가입(월 7890원), 별도 스포츠 패키지 구매, 아니면 경기 시청을 포기하는 것.
스포츠 중계는 영화나 드라마처럼 돈을 주고 봐야 하는 유료 콘텐츠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던 문화적 공공재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재편되고 있는 과정을 보여준다.
△OTT의 골드러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등장
글로벌 OTT 플랫폼들의 스포츠 중계권 투자 경쟁이 뜨겁다. 넷플릭스는 미국프로레슬링 WWE의 프로그램인 ‘로우’(RAW)의 10년 독점 중계권을 따내기 위해 50억 달러(약 6조9000억원)를 투자했다. 애플TV는 미국프로축구 메이저리그 사커(MLS) 10년 독점 중계권에 25억 달러(약 3조5000억원)를 쏟아부었다.
유튜브는 북미미식축구리그(NFL) 일요일 경기를 7년 독점 중계하기 위해 140억 달러(약 19조4000억원)를 지불했다. 아마존은 미국프로농구(NBA) 중계권을 위해 11년간 약 200억 달러(약 27조70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스포츠 중계권 투자 급증의 배경에는 OTT 업계의 구조적 변화가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후광효과로 큰 폭으로 성장했던 OTT 산업은 성숙기를 맞이했다. 콘텐츠 고갈, 과도한 콘텐츠 제작 비용 등 고질적인 문제가 찾아왔고, 새로운 돌파구로 스포츠 콘텐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스포츠 콘텐츠가 새로운 해법으로 부상하는 이유는 우선 스포츠만이 가진 차별화된 속성 때문이다. 스포츠는 ‘실시간 소비’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콘텐츠다.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생중계를 놓치면 그 순간의 감동은 되돌릴 수 없다. 정기적이고 예측 가능한 시청자 유입을 보장한다.
둘째, 강력한 ‘록인(Lock-in) 효과’를 발휘한다. 시즌이 6개월 이상 지속되는 스포츠는 구독자를 장기간 플랫폼에 묶어두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셋째, ‘광고 수익의 안정성’도 무시할 수 없다. 스포츠는 실시간성 때문에 다른 장르 대비 광고 회피 가능성이 낮다. OTT의 광고 기반 수익 모델에 최적화돼 있다.
실제 성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쿠팡플레이는 2023년 카타르 아시안컵 중계로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가 800만 명을 돌파했다. 티빙은 KBO 중계 유료화 후 731만 명까지 증가했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의 TNF(Thursday Night Football)는 평균 1300~1500만 명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대한 광고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이는 제작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오리지널 드라마 대비 훨씬 안정적인 투자 수익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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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퍼플렉시티 AI 생성 |
△문화 공공재에서 유료 상품으로
OTT의 스포츠 중계권 독점화는 비즈니스 모델의 변화 이상의 깊은 사회적 함의를 지닌다.
스포츠는 오랜 세월 동안 사회 통합의 상징이자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매개였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프로야구 경기는 온 국민이 함께 환호하고 좌절하며 공동체적 감정을 나누는 문화적 의례였다. 특히 스포츠 중계는 공영방송을 통해 계층과 지역을 불문하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문화적 공공재’로 기능해왔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공유된 스포츠 경험은 사회 전체의 ‘집합적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직장에서 야구 이야기, 동네 카페에서 축구 담론은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문화적 접착제다. 같은 경기를 보며 형성되는 공통의 기억과 감정, 이를 둘러싼 일상적 대화는 계층을 초월한 문화적 연대감의 기반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스포츠 중계의 OTT 독점화는 이러한 문화적 공유 기반을 해체하고 있다. 이제 프리미엄 구독료를 지불할 수 있는 계층만이 실시간으로 경기를 관람하고, 풍부한 해설과 분석을 통해 깊이 있는 스포츠 지식을 축적할 수 있게 됐다. 반면 디지털 소외층 및 경제적 여건이 충분하지 않은 계층은 단편적인 하이라이트나 지연된 정보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부르디외가 지적한 ‘문화 자본의 분화’가 스포츠 영역에서도 본격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술적 진보와 경제적 장벽이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계급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더 나은 시청 환경과 정보 접근성을 통해 스포츠에 대한 문화적 소양을 심화시키는 계층, 그렇지 못한 계층은 점차 스포츠 담론에서 소외되고 있다. 특히 스포츠 중계의 유료화가 당연한 시장 논리로 받아들여지면 문화적 배제를 당하는 계층조차 이를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내재화하게 된다.
결국 스포츠라는 대중문화 영역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구별짓기’가 작동하며, 디지털 시대의 문화적 계급 재생산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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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퍼플렉시티 AI 생성 |
△문화적 시민권의 회복을 위해서
이러한 문화적 계급화 현상에 맞서 ‘문화적 시민권’의 회복이 필요하다. 문화적 시민권이란 모든 시민이 경제적 지위와 관계없이 문화적 활동에 참여하고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을 의미한다. 스포츠 중계의 유료화는 이러한 기본권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보편적 시청권(Universal Viewing Rights)’ 제도를 통해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영국, 호주 등은 주요 스포츠 이벤트에 관한 보편적 시청권 제도를 갖추고 있다. 영국은 올림픽, 월드컵, 윔블던 등 국민적 관심사가 높은 경기를 반드시 지상파 방송사인 BBC와 ITV에서 방송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독일은 주간방송협약에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행사는 ‘일반적으로 접근 가능한 무료 TV 프로그램으로 방송돼야 한다’고 규정하 있다. 올림픽을 ‘주요 행사 목록’의 꼭대기에 명시하고 있으며, 올림픽, 월드컵, 유로 게임과 같이 규모가 큰 스포츠 경기는 공영방송국인 ARD와 ZDF에서 중계하고 있다. 프랑스도 시청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며 전체 가구 85% 이상 수신할 수 있는 방송 사업자가 올림픽 중계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OTT 플랫폼에 대한 사회적 책임도 강화해야 한다. 공적 자금이나 공공 인프라를 활용하는 플랫폼들은 일정 비율의 무료 스포츠 콘텐츠 제공을 의무화하거나, 저소득층을 위한 할인 요금제를 도입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문화바우처나 디지털 바우처와 같은 정책도 스포츠 중계 서비스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포츠가 사회 통합과 문화적 연대를 위한 공공재라는 인식의 전환이다. 그래야만 시장 논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화적 가치를 보호하고, 모든 시민이 공평하게 문화적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문화 민주주의는 이러한 적극적 개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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