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대정전 다음날인 지난달 29일 영국 옥스퍼드대 에너지연구소(OIES)가 SNS에 올린 보고서가 전력 업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신재생 에너지 산업을 육성하려면 안정적인 전력망을 유지할 수 있는 대책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OIES는 ‘전력망의 신뢰성 문제해결을 위한 관성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에서 전력망 주파수를 ‘욕조’에 비유했다. 발전량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들어오는 것에, 소비량은 배수구를 통해 물이 빠져나가는 것에 빗댔다.
들어오는 물과 나가는 물의 양이 같아야 수위(주파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데, 한쪽만 변화가 생기면 수위가 바뀐다. 욕조가 클수록 수위는 느리게 바뀐다. 이렇게 주파수를 서서히 변하도록 하는 건 터빈을 갖춘 동기식 발전기로, 원자력·화력·수력 등이 꼽힌다. 문제가 생겨도 회전 관성 때문에 출력이 쉽게 변하지 않고, 시스템이 회복될 시간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태양광·풍력 발전은 전기를 직류(DC)로 생산하고, 인버터를 통해 교류(AC)로 바꿔 공급하는 비동기식 발전원으로 관성이 없다. 이런 비동기식은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출력이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급증해 전력망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보고서는 “관성 저하는 재생에너지 확산의 필연적 부작용으로, 전력망 신뢰성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신재생 발전 정책과 시장을 설계할 때 기존 동기식 발전기를 유지하거나, 관성을 보완할 신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짚었다. 전력 업계 고위 관계자는 “OIES가 2023년 발간한 해당 보고서를 2년 지난 스페인 정전 다음 날 SNS에 공개한 건 정전 원인을 급격한 재생에너지 전환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유럽 국가들이 탈원전 폐기를 추진하는 것도 ‘전력망 관성’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스페인 정전 사태 이후 벨기에, 덴마크 등이 원전 금지 정책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이 관계자는 “태양광 발전은 근육 없이 뼈만 남은 몸처럼, 살짝만 건드려도 쓰러질 수 있지만, 원전은 튼튼한 근육을 가져 전력망을 지켜준다”며 “유럽 국가들이 관성 문제를 고민하던 시기 스페인 대정전이 벌어져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