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어때?
보랄의 빵집부터 울런공의 등대까지
서두를 이유가 없는 서던 하이랜즈 여행기








시드니에서 자동차로 남쪽으로 한 시간 반쯤 달리자 풍경의 속도가 달라졌다. 고층빌딩 대신 초원이 펼쳐지고, 와이너리와 목장, 오래된 펍과 빈티지 숍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시드니 사람들이 주말이면 찾아온다는 서던 하이랜즈다. 영국인들이 시드니에 정착한 뒤 농사를 짓기 위해 가장 먼저 개척한 고원지대다. 귀족과 목장주들이 저택을 짓고 살았고, 그 시간이 지금도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시간을 머금은 옛날이 현재 위에 올려져 있는 곳이었다.
보랄은 이 지역의 중심 마을이다. 봉봉 스트리트를 걷다 보면 1888년, 1890년, 1926년이라는 숫자가 건물 외벽에 새겨져 있다. 어느 방향으로 사진을 찍어도 오래된 건물이 배경이 된다. 나를 돋보이게 해준다. 흑백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골목 안으로 고개를 돌리니 엠파이어 시네마가 나타난다. 100년이 넘은 극장이다. 종이 상영표를 보는 순간 웃음이 났다. 팝콘각이 아니다. 크림 빵과 커피우유가 어울린다. 낡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흔한 키오스크 하나 안 보인다. 대신 작은 매표 창구에서 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오래된 극장에서 조디 포스터 주연의 요즘 영화 ‘파리의 사생활’이 상영되는, 보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 주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빵집이라는 ‘검넛 파티세리’에서는 아침부터 줄이 이어진다. 1888년 문을 연 그랜드 호텔 아래 자리한 빵집이다. 아몬드 크루아상과 미트파이를 보고 침이 고인다. 대표 메뉴인 바닐라 슬라이스는 버터 향이 진한 퍼프 페이스트리 사이에 부드러운 바닐라 커스터드를 채우고, 달콤한 바닐라 코팅으로 마무리한다. 한 입 베어 무니 바삭함, 부드러움, 달콤함이 차례로 밀려온다. 서울까지 빵 봉지를 들고 가고 싶다.미타공의 버섯 터널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의외의 장소였다. 1860년대 증기기관차가 달리던 철도 터널은 지금 버섯 농장이 됐다. 터널 안은 초겨울 바깥 온도보다 서늘하고, 습하다. 버섯이 자라기 최적의 환경이다. 축축한 흙 냄새와 갖가지 버섯의 향까지, 오감이 느리게 취한다. 터널 양옆에는 버섯 배지가 끝없이 이어진다. 빛이 거의 없는데도 생명은 가장 왕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주인장이 갓 수확한 버섯을 건네준다. 씹을수록 향이 온 몸에 퍼진다.
사람이 만든 느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서던 하이랜즈 여행으로 뭔가 부족하다 싶으면 시드니로 올라오면서 두 군데를 거쳐 보자. 사람이 만든 느림을 봤다면 이제는 자연이 만든 느림을 만나볼 차례다.
심비오 와일드라이프 파크의 코알라는 앞발로 유칼립투스 잎을 조심스레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오물오물. 한입. 잠시 멈춤. 다시 한입. 보는 내가 숨만 쉬고 정지된다. 여기서는 코알라를 억지로 깨우지도, 귀여움을 연출하게 하지도 않는다. 코알라가 살아가는 리듬을 그대로 존중한다. 심비오라는 이름도 ‘공생’에서 왔다고 하니 알겠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울런공 해안에 서니 파도가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왔다가 물러가고, 다시 밀려온다. 리듬이 같다. 반복되는 이 시간이 절벽을 만들고 모래사장을 빚어냈다. 느림은 멈춤은 아니다. 자연이 세상을 완성하는 방식이었다.언덕 위 플래그스태프 포인트 등대는 1937년 7월 23일부터 같은 자리에서 바다를 비추고 있다. 입구에는 라틴어 한 줄이 새겨져 있다. ‘Olim Periculum. Nunc Salus.’ 한때는 위험했지만, 이제는 안전하다는 뜻이란다. 등대는 89년째 같은 일을 반복한다. 낮에는 길잡이가 되고, 밤에는 다시 바다를 향해 불을 밝힌다. 바로 옆 언덕에는 140여 년 전 항구를 지키던 대포가 남아 있다. 방어의 흔적은 풍경이 됐고, 풍경은 사람들의 쉼이 됐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오래 바라보고 눈호강만 하면 된다.
시드니로 돌아오는 길에 깨달았다. 이번 여행의 기념품은 유명하다는 와인도, 기념 자석도 아니었다. 시간을 머금은 옛날을 현재 삶 위에 토핑처럼 올려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 여유였다. 그러면서 만났다. 조금 느려진 나 자신을.
글·사진 서던 하이랜즈=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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