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그린 죄 용서해 주세요"…밤마다 간절히 빈 남자의 최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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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악마(1902). 하늘에서 떨어져 부서진 악마. 브루벨이 전시장에서 매일 고쳐 그린 그림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쓰러진 악마(1902). 하늘에서 떨어져 부서진 악마. 브루벨이 전시장에서 매일 고쳐 그린 그림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1902년 겨울, 미술 전시가 열리고 있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갤러리. 매일 아침 화가는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는 붓으로 그림 속 인물을 덮어버린 후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습니다. 자세를 바꾸고, 배경을 바꾸고, 또 얼굴을 고쳤습니다. 전시가 개막해 관객이 드나드는 상황에서 화가가 그림을 고친다는 것부터가 이상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가가 계속해서 다시 그리는 인물이 악마였기 때문입니다. 그림은 보면 볼수록 섬뜩했습니다. 악마의 살갗도, 그가 쓰러져 있는 바위도, 등 뒤의 하늘도 온통 자잘한 면으로 쪼개져 마치 깨진 보석처럼 번쩍이고 있었습니다. 어떨 때는 남자가 고친 악마의 얼굴에 깊은 슬픔이 어려 있었습니다. 반면 끔찍하게 화내는 얼굴일 때도 있었습니다. 한 비평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치 진짜 악마가 화가를 위해 직접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악마의 얼굴 부분 확대.

악마의 얼굴 부분 확대.

그는 붓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광기 때문이었을까요, 창작열 때문이었을까요. 어쩌면 이 남자에게 그 두 가지는 구분할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러시아가 낳은 가장 비범하고 가장 불행한 화가, 미하일 브루벨(1856~1910). 훗날 거장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의 추상미술이 탄생하는 문을 연 이 남자는 러시아 현대미술의 시조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왜 악마를 그린 걸까요. 지금부터 브루벨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천사를 그리던 청년

브루벨은 1856년 러시아 시베리아의 도시 옴스크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폐결핵을 앓고 있어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병상에 누운 어머니는 아기였던 브루벨에게 종이를 오려 사람과 말, 환상 속 형상들을 만들어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브루벨이 세 살 때,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종이로 만들어주던 신비한 모양들을, 브루벨은 평생 기억 속에 간직했습니다.

그의 몸은 약했지만 머리는 뛰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미켈란젤로의 그림 한 점을 본 그가 집에 돌아온 뒤 기억력만으로 거의 똑같이 그려낸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한때 법 공부를 해야 했지만, 브루벨의 천직은 누가 봐도 화가. 법대를 졸업한 그는 스물네 살의 나이에 미술학교에 입학합니다.

미술학교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형태는 한 덩어리가 아니다. 작은 면(面)의 모임이다. 그렇게 그려라.” 브루벨은 이때 배운 방식을 끝까지 밀어붙였습니다. 덕분에 훗날 그의 그림은 마치 깨진 보석이나 색유리 조각을 이어 붙인 것처럼 보이게 됐습니다.

성 키릴 교회 벽화 '성령강림'(1884). 키이우의 12세기 교회를 복원하며 그린 작품. 비잔틴 모자이크를 고치는 과정에서 그의 화풍이 싹텄다. /키이우 성 키릴 교회

성 키릴 교회 벽화 '성령강림'(1884). 키이우의 12세기 교회를 복원하며 그린 작품. 비잔틴 모자이크를 고치는 과정에서 그의 화풍이 싹텄다. /키이우 성 키릴 교회

페르시아 양탄자를 배경으로 한 소녀(1886). 키이우 시절의 초기작. 보석처럼 빛나는 색채가 이미 드러나 있다. /키이우 국립미술관

페르시아 양탄자를 배경으로 한 소녀(1886). 키이우 시절의 초기작. 보석처럼 빛나는 색채가 이미 드러나 있다. /키이우 국립미술관

이런 방식이 완성된 곳은 키이우(지금의 우크라이나)였습니다. 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키이우로 불려가 12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교회의 벽화를 복원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5년 가까이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성모, 사도와 천사를 그렸습니다. 천 년 된 비잔틴 제국의 모자이크와 성화(聖畵, 이콘)를 고치면서, 브루벨은 자잘하게 빛나는 조각들을 쌓아 세상을 그리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런데 정작 천사를 그리는 브루벨의 믿음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새로 짓는 거대한 성당의 벽화를 그리는 일에 지원했지만, 교회는 그의 그림이 너무 낯설다며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가난 속에서 그는 점점 교회와 멀어졌고, 칸트 철학에 파고들며 ‘나는 진정한 예술을 만들 수 있는 천재이고, 진정한 예술은 아무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악마 그린 죄 용서해 주세요"…밤마다 간절히 빈 남자의 최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그렇게 20대 후반에 접어든 브루벨은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여성에게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던 브루벨은 시(詩) 한 편에 푹 빠지게 됩니다. 제목은 '악마'. 러시아 시인 레르몬토프가 쓴 이 시에는 하늘에서 쫓겨난 타락한 천사가 등장합니다. 이 천사는 한 인간 여인을 사랑해 입을 맞췄지만, 그 입맞춤이 여인을 죽게 만든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브루벨은 그 타락한 천사에 자기 모습을 겹쳐 봤습니다. 그가 악마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이 시기부터였습니다.

타마라와 악마(1890~91). 그를 사로잡은 레르몬토프의 시 '악마' 삽화. 타락한 천사가 인간 여인을 사랑하는 이야기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타마라와 악마(1890~91). 그를 사로잡은 레르몬토프의 시 '악마' 삽화. 타락한 천사가 인간 여인을 사랑하는 이야기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브루벨의 광기도 이때부터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브루벨은 친구와 함께 호수에 수영을 하러 갔습니다. 친구는 브루벨의 가슴에 난 깊은 흉터들을 발견했습니다. "무슨 일이야?" 친구의 물음에 브루벨은 답했습니다. "칼로 나를 그었어. 그러고 나니 사랑의 고통이 줄어들더군." 천재라는 자부심, 자신을 파괴하려는 욕구와 광기, 마음을 사로잡은 악마. 브루벨의 안에는 이미 파멸의 씨앗이 뿌려져 있었습니다.

악마를 그리다

1889년 서른세 살이 된 브루벨은 키이우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악마를 거대한 화폭 위에 끌어냅니다. 바위 위에 홀로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한 청년. 근육질의 몸을 지녔지만, 깍지 낀 두 손에는 왠지 힘이 없습니다. 얼굴엔 깊은 슬픔이 어려 있지요. 그의 대표작 '앉아 있는 악마'입니다.

앉아 있는 악마(1890). 바위에 홀로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청년. 브루벨의 첫 대표작이자 그가 평생 그린 악마 연작의 출발점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앉아 있는 악마(1890). 바위에 홀로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청년. 브루벨의 첫 대표작이자 그가 평생 그린 악마 연작의 출발점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짙은 푸른색, 보랏빛, 황금빛. 몇 가지 독특한 색들이 모여 화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색들은 자잘한 면으로 쪼개져 악마의 살갗, 바위, 하늘을 이루고 있습니다. 악마의 몸과 돌과 공기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고, 화면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광물처럼 번쩍입니다. 덕분에 이 악마는 살과 피가 아니라 크리스털과 불로 빚어낸, 이 세상에 없었던 존재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브루벨의 악마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뿔이 돋고 사람을 해치는 악마는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악마를 악령과 혼동한다. 하지만 내게 '악마'는 곧 '영혼'이다. 지상에서도, 천상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한 채 헤매는 인간의 정신이다." 거대한 힘을 지녔으나 외롭고, 악(惡)하지 않지만 무엇과도 화해하지 못한 채 고통받는 영혼. 그 악마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으나 이해받지 못하는 브루벨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점쟁이(1895). 카드를 펼친 여인을 그린 작품. 양탄자와 보석빛 색채에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점쟁이(1895). 카드를 펼친 여인을 그린 작품. 양탄자와 보석빛 색채에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아침(1897). 안개 낀 새벽의 자연을 그린 대형 장식 패널. /러시아 국립미술관

아침(1897). 안개 낀 새벽의 자연을 그린 대형 장식 패널. /러시아 국립미술관

이 그림을 본 대부분의 모스크바 사람들은 브루벨을 비웃었습니다.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을 보고 "야만적이고 추악하다"고 했습니다. 면을 깨뜨려 쌓아 올린 브루벨의 그림은 사람들 눈에 '괴상한 그림'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를 이해해 준 사람도 간혹 있어서, 이들이 그림을 주문하고 일거리를 마련해 준 덕분에 브루벨은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이 잠재운 악마

브루벨에게도 행복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896년 어느 날, 브루벨은 한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 리허설을 관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가수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브루벨은 무대 뒤로 달려가, 처음 본 그 여가수의 손에 입맞춤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만에 청혼했습니다. 여가수의 이름은 나데즈다 자벨라. 그녀는 잠시 망설인 뒤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브루벨은 훗날 말했습니다. "만약 거절당했다면, 나는 죽었을 거야."

그야말로 운명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녀를 만나고 브루벨은 인생에서 가장 환한 시기를 맞았습니다. 아내가 무대에 설 때마다 그는 객석을 지켰고, 순회공연을 할 때면 만사를 제쳐 놓고 뒤를 따라갔습니다. 아내가 노래한 한 오페라는 아흔 번도 넘게 봤습니다. 질리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답했습니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새로워." 그는 아내의 무대 의상과 배경을 손수 그렸고, 그녀의 모습을 몇 번이고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는 아내를 위해 살았습니다.

콘서트가 끝난 후(1905). 아내를 그린 그림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콘서트가 끝난 후(1905). 아내를 그린 그림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백조공주(1900). 백조가 아름다운 공주로 변하는 찰나. 모델은 그의 아내 자벨라로, 오페라에서 같은 배역을 노래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백조공주(1900). 백조가 아름다운 공주로 변하는 찰나. 모델은 그의 아내 자벨라로, 오페라에서 같은 배역을 노래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 시절을 대표하는 그림이 '백조공주'입니다. 이야기 속 백조가 아름다운 공주로 변하는 바로 그 찰나를 그린 작품. 그림 속 여인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온몸은 깃털과 보석으로 뒤덮여 있고, 눈빛은 어딘가 새를 닮았습니다. 사람도 백조도 아닌 그 '사이의 순간'에 멈춰 있는 것입니다. 악마를 그리던 브루벨의 화풍은 이 작품에서 또다른 방식으로 빛을 발했습니다. 세상을 자잘한 조각으로 부숴 어른거리게 만드는 화풍이,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변하는 마법의 순간을 멋지게 담아냈습니다.

1901년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들은 입술이 갈라진 채(구순열) 세상에 나왔지만 귀엽고 건강했습니다. 행복은 계속될 것 같았습니다.

화가의 아들 초상(1902). 갈라진 입술이 보이는 어린 아들. 이 그림을 그린 이듬해, 아들은 두 살도 안 돼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 국립미술관

화가의 아들 초상(1902). 갈라진 입술이 보이는 어린 아들. 이 그림을 그린 이듬해, 아들은 두 살도 안 돼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 국립미술관

이렇게 행복한 시절을 보내는 동안 브루벨의 악마에 대한 집착도 전보다 덜해졌습니다. 사랑이 잠시 악마를 잊게 한 것입니다.

추락

하지만 악마는 사라진 게 아니라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행복의 정점에서 브루벨의 광기가 갑자기 심해지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는 오래전 매독에 걸려 있었습니다. 매독이 진행되면서 원래 불안했던 브루벨의 정신은 급격히 악화됐습니다. 전시가 시작된 뒤 전시장에서 자기 작품을 끝없이 고쳐 그린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쉴 새 없이 떠들었으며 사소한 일에도 왈칵 화를 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상태가 나빠지면서 1902년 봄 브루벨은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하늘을 나는 악마(1899, 미완성). 바위에 앉아 있던 악마가 이제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처음의 악마보다 한층 어둡고 불길하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하늘을 나는 악마(1899, 미완성). 바위에 앉아 있던 악마가 이제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처음의 악마보다 한층 어둡고 불길하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듬해 두 번째 비극이 그를 덮쳤습니다. 1903년, 두 살이 채 안 된 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내가 이때까지 살면서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은 거야." 브루벨은 자책했습니다. 그의 정신은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이제 창작욕과 광기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도 브루벨은 집착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또 고쳤습니다.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몸과 마음을 더욱 갉아먹었습니다.

여섯 날개 세라핌(아즈라엘)(1904). 정신병원에서 그는 다시 천사를 그렸다. 죽음을 관장하는 천사 아즈라엘을 그린 작품이다. /러시아 국립미술관

여섯 날개 세라핌(아즈라엘)(1904). 정신병원에서 그는 다시 천사를 그렸다. 죽음을 관장하는 천사 아즈라엘을 그린 작품이다. /러시아 국립미술관

유리잔 속의 장미(1904). 병원에서 그린 작은 정물. 그는 병원에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유리잔 속의 장미(1904). 병원에서 그린 작은 정물. 그는 병원에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1905년 브루벨에게 모처럼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러시아 미술 아카데미가 그를 정식 회원으로 인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늦은 인정이었습니다. 그의 화가 인생은 이미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인 1906년, 쉰 살의 브루벨은 한 시인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림을 완성할 무렵 그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시력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밤마다 그는 병실을 기어다니며 신에게 빌었습니다. 악마를 그린 죄를 용서해 달라고요.

발레리 브류소프 초상(1906, 미완성). 그의 마지막 작품. 이 그림을 그리고 열흘 뒤 그는 시력을 잃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발레리 브류소프 초상(1906, 미완성). 그의 마지막 작품. 이 그림을 그리고 열흘 뒤 그는 시력을 잃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1910년 겨울, 그는 병실 창문을 열고 그 앞에 오랫동안 서 있기를 반복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폐렴에 걸렸고, 생각대로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죽기 전날 그는 자신을 돌보던 이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아카데미로 갈 때가 됐다." 그러고는 향수로 몸을 닦고 정장을 갖춰 입은 뒤, 그대로 누워 눈을 감았습니다. 다음 날, 그의 관은 정말로 미술 아카데미에 놓였습니다.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그를 떠나보내며 말했습니다. 브루벨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자(使者)였을지도 모른다." 그림을 보면 정말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말입니다. 보랏빛, 황금빛, 그리고 한밤의 짙은 푸른색. 그가 그 '다른 세계'를 그릴 때 쓴 색은, 마치 그런 색으로 이뤄진 세계를 두 눈으로 직접 봤던 것처럼 늘 한결같았거든요.

진주(1904). 진주조개 속 두 여인을 그린 후기작. 형태가 빛으로 흩어져, 추상으로 향하는 행보를 보여준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진주(1904). 진주조개 속 두 여인을 그린 후기작. 형태가 빛으로 흩어져, 추상으로 향하는 행보를 보여준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브루벨은 누구도 본 적 없는 세계를 그리려 했습니다. 당대에는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지만, 지금 그는 러시아 현대미술의 길을 닦은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때 추악하다던 그림들은 이제 러시아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가 보는 그림은 브루벨이 처음 의도했던 그 색은 아닙니다. 브루벨은 자신의 그림이 보석처럼 영원히 빛나기를 바랐고, 그래서 물감에 청동 가루와 금가루를 섞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그 가루들이 산화하면서 그림은 점점 더 검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가 그린 '다른 세계'의 빛이 더 흐려지기 전에, 언젠가 한 번쯤 그 앞에 설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기사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매거진, The Art of Mikhail Vrubel, 1856–1910 (Aline Isdebsky-Pritchard 지음), Mikhail Vrubel (Mikhail Allenov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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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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