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칸] 거장 문지우의 '피오르'…박찬욱 "어쩔 수 없는 황금종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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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피오르(Fjord)’의 주연 배우 레나테 레인스베(왼쪽부터), 크리스티안 문지우 감독, 세바스찬 스탠이 23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폐막식에서 배우 틸다 스윈턴과 함께 수상 직후 기뻐하고 있다.  /AFP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피오르(Fjord)’의 주연 배우 레나테 레인스베(왼쪽부터), 크리스티안 문지우 감독, 세바스찬 스탠이 23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폐막식에서 배우 틸다 스윈턴과 함께 수상 직후 기뻐하고 있다. /AFP

프랑스 남부 항구도시 칸에 울려 퍼진 마지막 이름은 크리스티안 문지우였다. 23일(현지시간) 폐막하며 12일의 여정을 마무리한 ‘제79회 칸 국제영화제’는 루마니아 감독 문지우의 ‘피오르(Fjord)’에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안겼다. 칸은 인공지능(AI)이 닿지 못한 인간의 자전적 고뇌와 정치·사회적 문제의식을 미학적으로 풀어낸 작가주의가 영화예술의 본령임을 재확인했다.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인 박찬욱 감독이 같은 한국인 감독을 수상자로 호명하는 장면을 그리던 시네필(영화 애호가)에겐 다소 아쉬울 수 있는 결과다. 현지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기대감을 높였던 ‘호프’를 연출한 나홍진 감독의 본상 수상이 불발됐기 때문이다. 다만 침체를 거듭해온 한국 영화가 오랜만에 칸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문화·국가·개인의 충돌 ‘피오르’

이날 칸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열린 폐막식에서 ‘피오르’는 최고 작품상에 해당하는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문지우 감독은 2007년 칸 영화제에서 ‘4개월, 3주…그리고 2일’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지 19년 만에 정상에 오르며 ‘대부’ 시리즈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등과 함께 황금종려상을 두 번 거머쥔 거장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2012년 ‘신의 소녀들’로 각본상, 2016년 ‘엘리자의 내일’로 감독상을 받는 등 꾸준히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인 칸의 선택을 받으면서 명실상부한 동유럽 대표 영화감독이 됐다.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피오르(Fjord)’의 감독 크리스티안 문지우가 23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폐막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피오르(Fjord)’의 감독 크리스티안 문지우가 23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폐막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

이날 시상자로 나선 세계적인 배우 틸다 스윈턴에게 트로피를 건네받은 문지우 감독은 “영화는 세상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문제들을 다뤄야 한다”며 “오늘날 사회는 분열되고, 극단화돼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이 영화는 모든 형태의 극단주의에 반대하는 선언이자 관용과 포용, 공감에 대한 메시지”라며 “이는 우리가 모두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로, 더욱 자주 실천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폐막식 후 기자회견에 나선 박찬욱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주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좋은 영화”라고 치켜세웠다.

‘피오르’는 다섯 아이를 둔 루마니아인 남편 미하이 게오르기우와 노르웨이인 아내 리즈벳 부부가 아내 고향인 노르웨이 외딴 마을로 이주하며 겪는 혼란을 그렸다. 자녀 학대 의혹으로 가족이 보호기관 조사를 받게 되며 국가 복지제도와 종교윤리, 문화적 지역 차가 개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묻는다. 다양성을 표방하는 유럽 사회가 한편으론 특정 신념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루마니아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문지우 특유의 리얼리즘을 강조한 주제 의식, 차갑고 건조한 롱테이크 등의 연출이 눈에 띈다.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인 박찬욱 감독이 23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폐막식에서 황금종려상 수상작을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인 박찬욱 감독이 23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폐막식에서 황금종려상 수상작을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

예술로 채운 정치·사회 메시지

‘침묵하지 않는 목소리’에 주목했던 지난해 칸의 기조가 올해도 이어졌다. 칸 심사위원대상을 안드레이 즈비아귄체프 감독의 ‘미노타우루스’에 안긴 게 대표적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반인 2022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프랑스 망명 중인 즈비아긴체프 감독은 앞서 프랑스 매체 르 몽드를 통해 “푸틴 정권의 전쟁에 반대하는 영화”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올해는 검열, 전쟁, 독재, 억압에 직접적으로 맞서는 영화가 많았던 작년과 달리 정치적 메시지를 절제된 표현 등을 통해 개인적이고 미학적 층위로 녹여낸 작품이 눈에 띄었다. 앞서 “아무리 훌륭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도 예술적으로 뛰어나지 않다면 결국 선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했던 박찬욱 감독의 심사기준과 비슷한 맥락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유명한 뉴질랜드 출신 영화감독 피터 잭슨이 12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유명한 뉴질랜드 출신 영화감독 피터 잭슨이 12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감독상을 공동 수상한 하비에르 칼보·하비에르 암브로시 감독의 ‘라 볼라 네그라’와 파베우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파더랜드’는 이런 경향이 잘 담긴 작품이다. ‘라 볼라 네그라’는 스페인의 국민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미완성 희곡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억압된 욕망, 퀴어 정체성, 남성성과 사회적 폭력 등의 문화적 긴장을 감각적으로 짚어냈다. 노벨문학상 작가인 토마스 만 부녀가 망명 이후 처음으로 독일 땅을 횡단하는 여정을 통해 지식인의 책임, 전쟁의 죄책감, 가족의 분열 등을 절제된 방식으로 그려냈다.

심사위원상은 발레스카 그리세바흐의 ‘꿈꿔왔던 모험’이 받았다. 여우주연상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를 연기한 비르지니 에피라, 오카모토 타오가 공동 수상했고, 남우주연상은 루카스 돈트의 ‘겁쟁이’의 출연한 에마누엘 마치아, 발렌틴 캉파뉴가 공동 수상했다. 각본상은 에마누엘 마레 감독의 ‘우리의 구원’에 돌아갔다.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왼쪽부터), 정호연, 테일러 러셀, 나홍진 감독, 마이클 패스벤더, 황정민, 조인성이 17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영화 ‘호프(Hope)’ 상영 행사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FP, 연합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왼쪽부터), 정호연, 테일러 러셀, 나홍진 감독, 마이클 패스벤더, 황정민, 조인성이 17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영화 ‘호프(Hope)’ 상영 행사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FP, 연합

돌아온 K무비

지난해 칸을 물들인 일본 영화의 약진을 지켜봐야 했던 한국영화는 올해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수상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나 감독의 ‘호프’가 4년 만에 경쟁 부문에 올라 “칸 경쟁에 등장한 가장 과감한 장르적 실험”이라며 현지 평단의 호평을 받은 가운데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된 연상호 감독의 ‘군체’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한국 영화의 세대교체 가능성과 장르적 다양성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나왔다. 진미송 감독의 단편 ‘사일런트 보이시스’가 학생 작품이 경쟁하는 ‘라 시네프’에서 2등 상을 수상하면서다. 같은 부문에 초청된 최원정 감독의 애니메이션 ‘새의 랩소디’는 음악 편집부터 사운드 디자인까지 혼자 완성한 작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최근 투자 위축 등 한국 영화가 침체된 흐름을 보이지만 새로운 세대의 장르적 상상력과 실험은 여전히 국제 영화계에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칸=김은진 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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