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돌목은 에너지가 응축되고 소용돌이치는 기운생동의 현장입니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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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수 ‘울돌목, 결의 기원’


“해남은 땅의 끝이 아니라, 땅의 시작입니다.”

흔히 ‘땅끝마을’로 불리는 전남 해남이 고향인 한홍수 화백(67)은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현대미술 화가입니다. 2015년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중국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인 왕두(69)와 2인전을 하기도 했었는데요. 한 화백과 왕두는 30여년 전 파리로 처음 유학왔을 때 노틀담 성당과 에펠탑 앞 등 길거리에서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던 ‘거리의 화가’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한 화백의 아틀리에는 파리 교외 지역의 아파트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단지에 서민들을 위한 임대용 아파트를 섞어 짓는데요. 프랑스에서는 아파트 단지에 예술가들을 위한 작업실을 꼭 일정비율씩 배치합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자신의 작업실을 마련하고, 안정된 작업을 할 수있도록 배려하는 것이죠. ‘예술의 나라’답게 돈이 없어도 예술을 할 수 있는 기초적인 사회 시스템을 갖춘 것입니다.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파리 외곽에 있던 한 화백의 작업실에 가끔씩 놀러갔었습니다. 라디오 프랑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작업하시던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당시 걸려 있던 작품들도 대부분 초상화나 누드화였습니. 그리고 산 그리메인듯, 바다의 파도인 듯. 수없이 중첩된 풍경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아, 산과 파도가 서로 닮았구나‘하는 어렴풋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약 10여년 전부터 한 작가는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영은미술관에서 레지던시를 할 때에도,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전시를 할 때도 그는 인체와 풍경을 결합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지는 엉덩이와 가슴의 곡선은 분명 산세를 닮았고, 파도를 닮았습니다.


이러한 한 화백의 물결처럼 부드러운 곡선이 중첩되는 그림에 대해 재불 미술평론가 심은록은 ‘결의 화가’라고 칭했습니다. 인체의 부드러운 ‘살결’에서 시작된 곡선은 손결이 되고, 숨결로 이어집니다. 그 숨결은 ‘바람결’이 되고, ’나뭇결‘이 됩니다. 시냇물에서는 ’물결‘을 일으키지요. 그의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처럼 경계선이 모호한데요. 연하게 칠하는 붓질을 수천번하면서 생겨나는 안개에 싸인듯 모호한 선은 ’잠결‘인 듯, ’꿈결‘인 듯 펼쳐집니다.


그런데 한 화백의 그림에는 언젠가부터 거센 파도가 주제를 이루는 경우가 많아졌는데요. 파리에 있을 때 잔잔하던 파도, 부드러운 곡선의 물결이 점점 거세지고, 심지어 소용돌이 치면서 기운생동(氣韻生動)하게 변해갔습니다. 특히 지난해 삼청동에서 열렸던 전시회에서는 유화인데도 검푸른색 파도를 표현하는 붓질에 비백이 많아져 수묵화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서울에서 이렇게 갑자기 거센 파도 그림을 만나게 되니 낯선 기분이었는데요.


그런데 지난 30일부터 5일까지 한 화백의 고향인 전남 해남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홍수 개인전 ‘울돌목, 결의 기원’ 전시회에 가보니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그가 고향인 해남의 섬에서 레지던스를 하면서 울둘목을 보면서 파도와 물결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받게 된 것이죠.


그의 그림 속에서 소용돌이치던 바다가 바로 울돌목이었습니다. 전시회 다음날 실제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이 펼쳐졌던 울돌목에 나가봤더니 그림 속에 그려진 소용돌이치는 파도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습니다. 심지어 우르르 쾅쾅하는 세찬 물소리까지 서라운드 오디오로 펼쳐지더군요.


“사람들은 흔히 자연을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울돌목에 가보면 그런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곳은 자연이 인간에게 친절한 장소가 아닙니다. 물과 물이 충돌하고, 방향과 방향이 부딪히고, 서로 다른 힘들이 끊임없이 싸우는 장소입니다. 제가 꾸준히 그려온 것은 풍경이 아니라 에너지입니다. 물 자체가 아니라 물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입니다.” (한홍수 작가)


울돌목은 우리나라 땅끝 지방인 해남 화원반도과 진도 사이에 의 좁은 해협인데요. 진도대교 아래에 있는 울돌목을 지도로 봐도 양쪽의 큰바다가 얼마나 좁은 해협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큰 바다에서 흘러가던 물결이 좁은 해협을 지나가느라 물살이 엄청나게 빠릅니다.


특히 조류가 밀려들어오고, 밀려나가는 시간대에는 물살의 속도가 더욱 거세집니다. 거센 조류 때문에 곳곳에서 파도가 생겨나고, 또다른 파도가 생겨나고, 파도가 부딪치는 곳에서는 소용돌이 현상이 펼쳐집니다. 바다 밑에 바위들이 있는지 물살이 흘러가고, 소용돌이가 펼쳐질 때마다 바다가 울어대는 소리가 진도대교 아래에서 진동합니다.


그래서 이 바다를 ‘울면서, 돌아가는, 목’이라고 해서 ‘울돌목’이라고 했을 겁니다. 그것을 한자로 표기하니 ‘명량(鳴梁)’이라고 했는데요. ‘명(鳴)’은 운다는 뜻이고, 량(梁)은 좁은 해협, 수로를 뜻하다고 하네요. 임진왜단 당시 이순신 장군이 큰 전과를 올렸던 해협의 이름도 모두 ‘명량, 노량, 칠천량, 견내량’ 같은 이름을 갖고 있죠.


한 화백의 그림 속에서는 바로 이러한 울돌목이 소용돌이가 빠르게 회전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거북선이 힘겹게 파도를 타고 있는데요. 한 척의 거북선이 파도를 거스르면서 노를 저으며 앞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 외롭고 위태로워 보입니다. 왜적은 모두 저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져 버렸는지, 아니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외롭게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거북선을 보면서 우리네 삶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무리 노를 저어봐도 제 자리인데, 자칫 한 순간 방심하고 삐끗하면 바로 저 소용돌이 아래로 빠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 오늘도 하루하루를 잘 이겨내고, 살아남는 한 척의 거북선 같은 인생들에게 박수를!

“울돌목은 제 그림의 근원이자 출발점입니다. 울돌목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거대한 물리적 에너지가 눈앞에서 드러나는 특별한 장소죠. 서로 다른 조류가 충돌하고 회전하며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흐름은 하나의 시각적 현상이자 자연의 사건입니다. 울돌목에서 드러나는 힘과 움직임, 그리고 그 안에 응축된 에너지. 울돌목을 통해 드러나는 ‘기(氣)’의 흐름과 충돌, 생성의 생생함을 제 그림 속에 담고 싶습니다.”

전시장에는 심은록 박사가 한 화백의 작품을 바탕으로 AI툴을 이용해서 만든 영상도 함께 전시됐습니다. 작가의 파도 그림이 울둘목의 소용돌이가 되어 돌아가고, 파도 위에 올라탄 거북선 아래로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는 말이 뜹니다.

심은록 ‘울돌목, 결의 기원’.

심은록 ‘울돌목, 결의 기원’.

소용돌이치던 파도는 붉은색, 푸른색 물결로 휘감아들어가며 태극이 되고, 하늘로 이어져 안드로메다 은하처럼 우주에서 휘감아 돌아갑니다. 이 영상을 보니 울돌목의 소용돌이와 우주의 은하계도 모두 원운동을 하며 돌아가고 있네요. 만물이 기운생동하는 원리는 모두 같으며, 울돌목이 바로 그러한 기운(氣運)이 집중되는 장소임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의 제목이 ‘결의 기원’인가 봅니다.


그런가 하면 해남 달마산의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 새집처럼 놓여 있는 도솔암도 화폭에 담겨 있습니다.


한 화백의 그림은 해남 대흥사 해탈문에서 바라본 두륜산의 와불(臥佛) 형상으로도 이어집니다. 한 작가는 대흥사 주지스님의 배려로 경내에서 며칠 밤을 묵으며 새벽마다 와불의 형상을 화폭에 담았다고 합니다.


또한 전시장 한 켠에는 한 화백이 그린 해남 어르신들의 얼굴 초상화가 세로로 길게 깨알같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중간에는 사람 키 높이에 거울이 붙어 있어 관람객들도 해남 사람들의 얼굴 그림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한 화백은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얼굴 초상화를 그려왔는데요. 파리에서 거리의 화가로서 수많은 인종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왔고, 지금도 자신의 초상화를 꾸준히 그리고 있습니다.


해남에는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이 있는데요. 사랑채인 녹우당에는 처마가 이중으로 길게 확장돼 있어, 비가 오거나 햇빛이 강한 날에도 넉넉한 마루 공간에서 시를 짓고,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며 풍류를 즐기고 교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특징입니다. 녹우당에 있는 박물관에는 윤씨 가문의 다양한 유물과 예술품이 전시돼 있는데요.


그 중에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작품도 있습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세밀한 표현으로 조선의 얼굴 그 자체를 남기고 있는데요. 평생을 초상화와 인체의 표현에 몰두해온 한 화백은, 윤두서로부터 이어지는 해남의 화맥(畵脈)을 잇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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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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