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7년 전인 2018년 11월. 당시 부산고법에선 일찌감치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을 부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노란봉투법은 원청이 하청 기업 직원들로 구성된 노조와 직접 단체교섭을 해야 하는 '무한 책임'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부산고법은 판결을 통해 원청과 하청 노조가 근로계약 관계로 얽혀 있지 않는 한 교섭에 나설 이유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法, 7년 전 '원·하청 교섭' 부정…"근로계약 맺어야"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앞서 원청인 HD현대중공업을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HD현대중공업이 하청 근로자들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만큼 직접 교섭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대법원이 2010년 내놓은 HD현대중공업 판결을 발판으로 삼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하청 노조 운영에 지배·개입했다는 논란에 휩싸이면서 법적 분쟁을 겪었다. 하청 노조가 HD현대중공업을 상대로 부당노동행위를 막아달라는 구제 신청을 노동위원회에 제기한 것.
대법원은 당시 원청이 기본적인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으면서 하청 노조 운영에 지배·개입했다면 부당노동행위 구제 명령을 이행할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청 노조는 이 판결을 단체교섭 상황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원청이 도급계약을 통해 하청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할 경우 교섭 상대방이 된다고 봤다.
하지만 1심인 울산지법은 같은 해 4월 '지배·개입의 부당노동행위'와 단체교섭 상황에서 규정하는 사용자가 다르다고 못 박았다. 노조 운영에 관한 부당노동행위를 다툴 땐 원청과 하청 노조가 근로계약 관계로 얽혀 있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단체교섭은 이야기가 다르다는 판단이다.
1심은 "단체교섭 제도는 단체협약을 통해 근로계약의 내용을 집단적으로 형성·변경하는 기능과 가능성을 본질로 한다"며 "근로자와 사용자 사이의 개별 근로계약 관계의 존재 여부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청 근로자와 근로계약을 맺지도 않은 원청이 하청 노조와 교섭에 나설 수는 없다는 의미다.
2심인 부산고법은 근로조건의 핵심인 임금을 누가 실질적으로 결정했는지를 들여다봤다. 임금을 원청이 정했다면 하청 근로자의 근로조건도 결정했다는 의미고 이 경우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한 만큼 교섭 상대방이 될 수 있다는 연결고리가 완성된다.
하지만 2심도 결론은 같았다. 2심 재판부는 "HD현대중공업은 도급계약에 따른 공사대금을 사내 하청에 지급했을 뿐 사내 하청 근로자들에게 직접 임금을 지급하거나 임금구조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라며 "하청 근로자들 임금이 HD현대중공업이 지급하는 공사대금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HD현대중공업이 임금에 대한 지배·결정권을 행사했다고 평가하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최근 판결선 원·하청 교섭 인정…'실질적 지배력' 주목
이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어갔지만 7년째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다. 대법원은 전원합의체를 통해 최종 판단을 내릴 예정이다. 대법원에서 사건이 계류된 동안 법원 판결 경향이 뒤집혔다. 근로조건 등에 대해 지배력을 가지는 자를 노동조합법상 사용자로 간주하는 '실질적 지배력설'이 하급심 판결에서 인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CJ대한통운·현대제철·한화오션 등에서도 원청과 하청 노조 간 교섭 성립 여부가 쟁점이 됐는데 법원은 "원청이 직접 하청 노조와 교섭해야 한다"는 일관된 판결을 내놨다.
CJ대한통운은 대법원에서 원심이 확정될 경우 하청인 집배점주와 계약을 맺고 일하는 택배기사들로 구성된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과 교섭 의무를 떠안게 된다. 현대제철도 원심 판단대로면 산업안전 관련 의제를 하청 노조와 교섭해야 한다. 한화오션은 하청 근로자들에게 지급되는 학자금·성과급 지급과 관련해 교섭에 나서게 된다.
이 판결이 대법원 최종 판단을 거쳐 원·하청 교섭의 길이 열린다면 설령 노란봉투법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더라도 산업현장에서 유사 분쟁이 확산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지나친 우려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화오션 사건을 맡은 1심 재판부는 "교섭 의무는 교섭의 창구를 열어 두는 의무로 성실한 협의 의무를 의미할 뿐 단체교섭을 한 원청에 노조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 단체협약을 체결할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고 하청과의 특정 계약을 강제하거나 계약 내용을 제한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국회 통과 눈앞, 경영계 초비상…불법파견 분쟁 우려도
법원의 시계와는 달리 국회에선 노란봉투법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 노란봉투법은 지난 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했고 4일 본회의에서 처리될 전망이다.
경영계는 발칵 뒤집혔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대한건설협회 등 주요 업종별 단체들은 지난달 30일 공동성명을 내고 "개정안은 도급이라는 민법상 계약의 실체를 부정하고 계약의 당사자가 아닌 원청을 노사관계의 당사자로 끌어들여 쟁의행위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원·하청 교섭을 인정하면 하청 기업의 독립적인 경영권을 부정하게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하청 기업이 앞으로는 근로조건 등을 결정할 때 원·하청 교섭 결과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지적이다.
불법파견 분쟁의 빌미가 될 우려도 제기된다. 원·하청 교섭을 할 경우 원청이 하청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결정하게 된다. 이 때문에 원청이 근로조건을 좌우하면 도급관계가 아니라 '파견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 하청 근로자와 파견관계로 간주되면 파견기간이 2년을 넘긴 인원을 모두 직고용해야 할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
美·EU 기업들 '철수' 가능성…"극도의 혼란" 우려
외국계 기업들도 파장을 우려하고 있다. 주한유럽상공회의소(ECCK)는 한국 철수 가능성을 언급했고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는 "외국 기업 투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꼬집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31일 자료를 내고 경영계 우려를 "과도하다"고 깎아내렸다. "특정한 근로조건과 관련해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경우에만 (원청이) 사용자로 인정된다"는 이유다.
그러면서 "단순한 투자나 공장증설 그 자체만으로 노동쟁의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사업 경영상의 결정 중에서도 정리해고와 같이 근로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근로조건의 변경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경우가 노동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은 같은 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노란봉투법 입법 중단을 호소했다. 손 회장은 "수십, 수백개의 하청 업체 노조가 교섭을 요구한다면 원청 사업주는 건건이 대응할 수가 없어 산업현장은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질 것으로 우려된다"며 "원청을 대상으로 한 하청 노조의 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하면 원청은 협력업체와 거래를 단절하거나 해외로 사업체를 이전할 수도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