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심리] ‘고귀한 가치’에 앞선 인간 욕망 알아야 사회 현상 해석 가능
한국에서 의사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높아진 건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부터다. 당시 많은 직장인이 실업자가 되는 등 어려움을 겪을 때 의사는 건재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이 터지면서 공대 졸업생들이 굉장히 어려워졌을 때도 의사는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의사가 다른 분야 종사자보다 안전하게 돈을 잘 벌 수 있는 직업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美 독립전쟁 도화선은 세금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의대 입학 커트라인은 특별히 높지 않았다. 수도권 명문대 공과대 입학 점수가 지방대 의대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의대 쏠림 현상이 나타나면서 전국 모든 의대가 명문대 공과대보다 들어가기 어려워졌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2000년대 이후 갑자기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돼 의대 쏠림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IMF 구제금융 사태, 닷컴버블 사태로 의사의 안정적인 고소득이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이후 의대 쏠림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볼 때 한국에서의 의대 쏠림 현상은 돈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근대 사회를 만들었다는 세계 주요 혁명을 보자. 자유와 평등 측면에서 가장 유명한 혁명은 1775년 미국 독립전쟁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이다. 미국 독립전쟁은 시민들이 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한 혁명이었고, 프랑스 혁명은 왕정 정치를 끝내고 자유·평등·박애의 사회를 향해 나아간 움직임이었다. 이 두 사건은 다른 많은 나라들에 이정표가 됐다.
이 혁명들의 목적은 모두 시민에게 자유를 주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돈이라는 천박한 가치는 위대한 혁명에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혁명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혁명에 뛰어든 게 아니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높은 가치를 추구하고자 혁명가가 됐다. 그런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두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모두 돈 문제였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혁명의 직접적 원인은 1773년 12월 발생한 보스턴 차(tea) 사건이다. 영국이 식민지 미국과 차 무역을 하며 세금을 부과하자 미국인들이 크게 반발했다. 그 과정에서 몇몇 주민이 보스턴 항구에 정박한 영국 배를 습격해 배 안에 있던 차 상자들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미국은 크게 부딪쳤고, 미국 시민들은 독립을 선언하며 영국과 전쟁에 돌입했다. 결국 미국 독립혁명을 시작한 건 세금에 반발한 시민들이었다는 얘기다. 영국은 “돈을 내라” 하고, 미국은 “돈을 내지 않겠다”고 한 게 양측 충돌의 초점이었다. 프랑스 혁명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 등을 지원하면서 많은 돈을 써버렸다. 재정적자가 컸고, 국가에 돈이 없었다. 루이 16세는 국가 재정을 정비하고자 세금 인상을 추진한다. 세금을 더 많이 걷으려면 절차가 필요했기에 귀족·성직자·평민 대표가 모이는 삼부회를 소집했다. 여기에서 평민 대표들이 세금 인상에 반대했고, 정 세금을 올리고 싶으면 먼저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 조건을 내걸었다. 루이 16세는 여러 요구를 내세우는 삼부회를 해산하려 했으며, 이것을 기화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됐다. 결국 프랑스 혁명도 “돈을 내라”와 “돈을 내지 않겠다”가 부딪쳐 발생한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영국 대헌장 마그나카르타가 만들어진 과정도 마찬가지다. 마그나카르타는 영국 존 왕과 귀족들 사이에서 맺어진 협약으로, 왕권을 제약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마그나카르타가 제정되기 전 왕은 무소불위 존재였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마그나카르타는 왕도 법적 절차를 지켜야 하고,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해선 안 된다고 규정했다. 왕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정사회에서, 왕도 법을 지켜야 하는 입법군주사회로 나아간 첫 걸음이 마그나카르타다.
그런데 마그나카르타도 출발점은 역시 돈 문제였다. 존 왕은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 했고, 귀족들이 반발한 것이다. 마그나카르타에서 가장 중요한 조항은 왕이 세금을 자의로 올릴 수 없도록 한 것, 왕이 시민들을 마음대로 체포·감금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왕이 세금을 올리려면 일반 평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시민을 체포·감금하려면 법에 근거해야만 했다.
세금을 마음대로 올릴 수 없다는 건 딱 봐도 돈과 관련된 문제다. 하지만 시민을 체포·감금할 때 법적 절차를 지키도록 한 조항은 돈과 별 관계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떤 경우에 왕이 마음대로 사람을 체포했을까. 왕을 기분 나쁘게 하면 체포·감금될 수 있는데, 이건 왕과 굉장히 가까이 지내는 사람에게만 해당됐다. 왕의 얼굴조차 보기 힘든 일반 귀족이나 시민이 이런 이유로 체포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반 사람이 체포되는 경우는 보통 왕이 돈을 요구했는데 내지 않을 때였다. 당시 체포·감금은 돈을 빼앗기 위한 주요 수단이었던 셈이다.
영국만의 일은 아니다. 지방 수령이 돈 많은 사람을 잡아가둔 뒤 돈을 낼 때까지 풀어주지 않는 방식으로 돈을 탈취한 이야기는 조선 말기 기록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세계 어디서든 권력자는 체포·감금 권한을 돈 벌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체포·감금을 하려면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마그나카르타 조항은 직접적으로 돈과 연결된 것이다.세계를 바꾼 혁명은 대부분 돈 때문에 발생했다. 하지만 돈 문제 때문에 혁명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돈 때문에 들고 일어나는 것은 너무 세속적이다. 그래서 국민은 자유, 민주주의, 박애 같은 고귀한 가치를 내세운다. 돈이 진짜 원인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이야기는 대놓고 역사에 기록하지 않는다.
겉과 속이 같아야 하는 한국인도…
그런데 돈과 관련해서는 한국인도, 아니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이 혼네와 다테마에가 다른 게 일반적인 듯하다. 우리는 “돈 때문에 의사가 되려 한다” “돈을 많이 버는 변호사가 될 것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사업을 한다”고 하면 뭔가 부정적이고 천박한 것으로 간주한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자유·평등·박애를 위해” “인류를 위해”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라고 하면 고상하게 본다. 솔직하게 “돈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다른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돈과 관련해서는 대다수 사람이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다르다. 사회 현상을 해석할 때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하는 사항이라고 본다.최성락 박사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양미래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21년 투자로 50억 원 자산을 만든 뒤 퇴직해 파이어족으로 지내고 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547호에 실렸습니다〉
최성락 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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