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 교황청 지정 ‘해미국제성지’
프란치스코교황 2014년 ‘특별 방문’
외국처럼 성인-기적 등과 관련 없이
무명 순교자들의 ‘특별하지 않은’ 땅
2020년 11월 교황청이 승인한, 국내 유일의 국제 성지인 충남 서산시 해미국제성지를 14일 찾았다. 기록적인 극한 호우로 안타까운 수해를 당하기 며칠 전이었다. 성지는 신자들이 빈번히 순례하는 거룩한 장소. 가톨릭에는 교구장이 승인하는 교구 성지, 주교회의가 승인하는 국가 성지, 교황청이 승인하는 국제 성지가 있다. 아시아에서 국제 성지는 필리핀 마닐라 안티폴로 대성당, 인도 첸나이 성 토마스 대성당에 이어 세 번째다.
해미 지역에선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1871년) 등을 거치며 100여 년 동안 수천 명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 132명. 특히 병인박해 시기에는 관헌들이 교수형과 참수 등으로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쳐 아예 물웅덩이와 구덩이에 수십 명씩 몰아넣고 생매장하는 행위를 수없이 반복했다고 한다. 경내 노천성당 옆에 상당한 깊이와 너비를 가진 ‘진둠벙’이란 이름의 웅덩이가 있는데, 팔을 묶고 끌고 가던 신자들을 거꾸로 떨어뜨려 죽게 한 곳이다.
국제 성지는 대부분 유명한 성인이나 특별한 기적 등과 연관이 있는 곳이다. 인도의 국제 성지인 성 토마스 대성당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사도 토마스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다.반면 해미국제성지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순교자 대부분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은 무명 순교자들의 땅. 하지만 교황청에서는 오히려 이런 ‘특별하지 않음’을 더 가치 있는 신앙의 모범으로 여겼다. 국제 성지가 되기 전인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특별 방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6년 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미성지를 국제 성지로 선포했다.
국제 성지답게 경내 대성당에서는 매일 오전 11시 미사가 열린다. 이날 미사를 맡은 인도 출신의 하비에르 신부는 “방문객이 많은 날은 성지와 관련된 내용으로, 적은 날은 일상적인 내용으로 미사를 본다”며 “오늘은 폭염으로 사람이 적어 일상적인 내용으로 진행했다”고 말했다. 6일에는 휴가차 방한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을 맡고 있는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 미사를 집전했다. 유 추기경은 대전교구장 시절 해미성지의 국제 성지 추진을 주도한 바 있다.
그늘에 앉아 잠시 흐르는 땀을 닦는데 ‘여숫골’이라 쓰인 커다란 돌덩이가 보였다. 이 지역의 다른 이름이다. 당시 형장으로 끌려가거나, 산 채로 매장당하던 신자들이 한결같이 ‘예수, 마리아’를 절규했다. 이 소리가 멀리 있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여수, 머리’로 들렸다는 것. 이 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변했다고 한다. 기독교 전통이 깊은 나라도 아니었는데, 목숨을 버려서까지 자신이 택한 길을 간 이들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종교를 떠나, 그 무엇으로든 자신의 삶을 진실함으로 채우려 했던 옛사람의 마음이 느껴지는 하루였다.서산=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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