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작품이냐"...'수백억 명작', 세금 폭탄 맞은 사연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5 days ago 14

공간 속의 새(1928). 브랑쿠시의 대표작. 날개도 부리도 없는 이 황동 조각이 1926년 뉴욕 세관에서 '주방용품'으로 분류되며 세기의 재판이 시작됐다. / 뉴욕 현대미술관(MoMA)

공간 속의 새(1928). 브랑쿠시의 대표작. 날개도 부리도 없는 이 황동 조각이 1926년 뉴욕 세관에서 '주방용품'으로 분류되며 세기의 재판이 시작됐다. / 뉴욕 현대미술관(MoMA)

“이게 뭔가요?”
“조각 작품입니다. 새를 표현했습니다.”
“새요? 날개도 없고 부리도 없는데? 그냥 금속으로 만든 도구처럼 보이네요. 관세 40%를 부과하겠습니다.”

1926년 10월 미국 뉴욕의 항구. 프랑스에서 온 배에는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1876~1957)의 작품이 실려 있었습니다. 뉴욕 갤러리 전시에 나올 작품이었습니다. 미국 관세법에 따라 예술품은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됐고, 브랑쿠시의 작품들도 그래야 했지요.

문제는 높이 137cm의 황동 조각이었습니다. 세관원의 눈에 이 물건은 도저히 예술 작품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매끈하게 연마된 곡선이 위를 향해 뻗은 길쭉한 금속 막대. 세관은 이 물체를 ‘주방용품 및 병원 용품’ 항목으로 분류한 뒤 40%의 관세를 매겼습니다. 작품을 사기로 했던 구매자는 황당해했습니다. 졸지에 거액의 세금을 부담하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세관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날개도 부리도 깃털도 없는 이것을 ‘새를 표현한 예술품’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그렇게 미국 법정에서는, “뭐가 예술이고 뭐가 예술이 아닌가”를 판단하는 ‘세기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조각이라고 하면 보통 사실적인 작품들을 떠올립니다. ‘생각하는 사람’(지옥의 문)으로 유명한 오귀스트 로댕 같은 조각가의 작품들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사실 요즘의 조각 중 이렇게 사실적인 것은 거의 없습니다. 미술관에는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형태의 조각이 가득하고, 미술품 경매에서는 이런 조각에 ‘억’ 소리 나는 가격이 붙습니다. 이런 작품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요. 재판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자유롭게 조각가의 생각과 심상을 표현한 ‘현대 조각’. 오늘은 그 문을 열어젖힌 현대 조각의 아버지, 브랑쿠시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잠자는 뮤즈(1910). 눈을 감고 잠든 여인의 머리. 몸도 목도 받침대도 없다. 달걀 형태의 매끈한 청동 머리가 바닥에 그냥 놓여 있다. 전통 조각에서 두상은 항상 받침대 위에 세워졌다. 브랑쿠시는 받침대를 없애고 머리를 옆으로 눕히는 것만으로 조각의 문법을 바꿨다. 브랑쿠시는 이 '잠자는 머리'라는 주제를 20년 가까이 반복하며 다듬었다. 모델은 르네 이라나 프랑숑 남작부인. 201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다른 버전의 청동본이 약 750억원에 낙찰돼 브랑쿠시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잠자는 뮤즈(1910). 눈을 감고 잠든 여인의 머리. 몸도 목도 받침대도 없다. 달걀 형태의 매끈한 청동 머리가 바닥에 그냥 놓여 있다. 전통 조각에서 두상은 항상 받침대 위에 세워졌다. 브랑쿠시는 받침대를 없애고 머리를 옆으로 눕히는 것만으로 조각의 문법을 바꿨다. 브랑쿠시는 이 '잠자는 머리'라는 주제를 20년 가까이 반복하며 다듬었다. 모델은 르네 이라나 프랑숑 남작부인. 201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다른 버전의 청동본이 약 750억원에 낙찰돼 브랑쿠시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농부의 아들, 조각가가 되다

브랑쿠시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칠남매 중 다섯째. 아버지는 그를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브랑쿠시는 일곱 살 때부터 들판으로 나가 양을 돌봤습니다.

브랑쿠시가 태어난 곳은 루마니아 남서부 올테니아 지방의 작은 마을 호비차였습니다. 이곳은 목조 공예로 유명한 지방이었지요. 마을 교회의 나무 기둥은 멋진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돼 있었고, 이곳 사람들은 누구나 나무를 깎아 자기 숟가락이나 침대 기둥 같은 생활용품을 만들 줄 알았습니다. 브랑쿠시도 손재주가 좋았습니다. 어린 그에게 유일한 낙은 양치기 일을 하는 짬짬이 나무를 깎아 뭔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형들은 그런 브랑쿠시를 탐탁지 않게 봤습니다. “양치기 일이나 잘 할 것이지, 쓸데없이….” 가족들은 걸핏하면 브랑쿠시를 때리곤 했습니다.

루마니아 전통 가옥의 목조 기둥과 대문 장식.

루마니아 전통 가옥의 목조 기둥과 대문 장식.

어린 나이였지만, 브랑쿠시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이렇게 살다가 양치기로 늙어 죽고 싶지 않아.” 세 번의 가출 시도 끝에 브랑쿠시는 마침내 집을 나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아홉 살이었습니다.

브랑쿠시는 마을에서 가까운 도시로 향했습니다. 염색공의 조수, 식료품 가게 점원, 여관 직원…. 시켜주는 일이라면 뭐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독학으로 글을 깨쳤습니다. 나무를 조각해 뭔가를 만드는 일도 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브랑쿠시에게 누군가가 내기를 걸었습니다. “네가 그렇게 조각을 잘해? 그래도 악기는 못 만들겠지. 그건 기술이 필요하니까 말이야. 너는 학교도 안 나왔잖아.” 그러자 브랑쿠시는 주변에서 주운 나무 조각으로 단숨에 바이올린을 만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나가던 사업가가 봤습니다. “정말 굉장한 재능이군. 혹시 공예 학교를 한번 다녀보지 않을래?” 기적처럼 찾아온 행운. 브랑쿠시는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1894년 공예 학교에 입학한 브랑쿠시는 나무를 다루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결을 읽는 법, 나무의 특징에 따라 손을 쓰는 법, 끌과 망치로 형태를 잡아가는 법…. 브랑쿠시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일이었습니다. 4년 뒤인 스물두 살 때 공예학교를 우등 졸업한 그는 부쿠레슈티 미술학교에 진학해 정식으로 정통 조각을 배우게 됩니다. 인체의 비례를 배우고, 점토를 빚어 형태를 만들고, 석고로 틀을 뜨고…. 이 역시 브랑쿠시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뛰어난 성적 덕분에 그는 학교를 조기 졸업하게 됩니다.

에코르셰(1903). 피부를 벗긴 인체 모형. 근육과 힘줄이 한 올 한 올 정밀하게 재현돼 있다. / 부쿠레슈티 국립미술관

에코르셰(1903). 피부를 벗긴 인체 모형. 근육과 힘줄이 한 올 한 올 정밀하게 재현돼 있다. / 부쿠레슈티 국립미술관

에로크셰 세부.

에로크셰 세부.

졸업 직전 그가 만든 에코르셰(피부를 벗긴 인체 모형)를 보면 그의 재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근육과 힘줄의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 이 조각에는 근육 하나하나, 힘줄 한 올 한 올이 정밀하게 재현돼 있습니다. 그가 훗날 만드는 현대 조각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수작으로, 당시에도 그 수준을 인정받아 권위 있는 전시장인 부쿠레슈티 아테네움에 전시됐습니다.

걸어서 온 남자

1903년 스물일곱 살의 브랑쿠시는 루마니아를 떠났습니다. 목적지는 파리. 당시 파리는 세계 예술의 수도였습니다. 야망 있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파리로 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다만 브랑쿠시에게는 기차표를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뮌헨을 거쳐 취리히, 바젤을 지나 1904년 파리에 도착하기까지 18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훗날 브랑쿠시는 ‘걸어서 파리까지 간 남자’로 불리게 됩니다.

로댕의 키스(1882). 남녀가 포옹하며 입맞추는 순간을 대리석으로 재현했다. 피부의 질감, 근육의 긴장까지 느껴지는 사실주의 조각의 정점이다. / 파리 로댕 미술관

로댕의 키스(1882). 남녀가 포옹하며 입맞추는 순간을 대리석으로 재현했다. 피부의 질감, 근육의 긴장까지 느껴지는 사실주의 조각의 정점이다. / 파리 로댕 미술관

파리에 도착한 브랑쿠시는 유럽 미술 교육의 중심이었던 에콜 데 보자르(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합니다. 이곳에서 조각을 공부하던 1907년, 브랑쿠시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조각의 신’으로 불리던 오귀스트 로댕의 작업실에 조수로 들어간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그의 조수가 된다는 건 세계 최고의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조각가로서 브랑쿠시의 미래는 보장된 셈입니다. 하지만 브랑쿠시는 두 달 만에 작업실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큰 나무 그늘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브랑쿠시는 말했습니다. 로댕은 너무 거대한 존재였습니다. 그 곁에 있는 한, 무엇을 만들어도 로댕의 복제품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찾으려면 그 그늘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만들기 어려운 것은 없다. 어려운 건, 그걸 만들 수 있는 상태에 자기를 놓는 것이다.” 가난한 무명 조각가였던 그는 자신만의 예술을 펼치기 위해 보장된 미래를 걷어찼습니다.

그리고 브랑쿠시는 로댕과 정반대의 길을 택했습니다. 당시 대부분 조각가들의 작업 방식은 이랬습니다. 조각가가 하는 일은 부드러운 점토로 원형을 빚는 일, 말하자면 디자인까지만. 실제로 물리적인 작품을 만드는 건 점토를 보고 돌을 깎는 전문 석공, 혹은 청동을 붓는 주조공이었습니다. 로댕의 작업실에도 수십 명의 석공과 조수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브랑쿠시는 그 방식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돌을 직접 깎고 나무를 직접 다듬었습니다. 체력적으로도 힘든 일이었지만, 한번 깎으면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재료의 결을 손으로 느끼면서 차근차근 형태를 찾아갔습니다.

로댕의 키스 세부.

로댕의 키스 세부.

조각을 만드는 방식 뿐 아니라 작품의 스타일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한때 스승이었던 로댕과 브랑쿠시의 작품을 비교하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로댕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키스’는 남녀가 포옹하는 장면을 대리석으로 깎은 것입니다. 피부의 질감과 근육의 긴장, 입술이 닿는 순간의 체온까지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누가 봐도 “잘 만들었다”고 감탄할 작품입니다.

"이게 무슨 작품이냐"...'수백억 명작', 세금 폭탄 맞은 사연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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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브랑쿠시는 똑같은 제목의 작품 ‘키스’를 만들었습니다. 전혀 다릅니다. 네모나게 깎은 석회석. 두 사람이 돌 하나에 갇혀 서로 껴안고 있는데, 얼굴 구분이 거의 안 됩니다. 눈은 단순한 가로선이고 코는 하나의 세로선을 둘이 나눠 쓰고 있습니다. 손가락 같은 디테일은 없습니다.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닙니다. 루마니아 미술 학교를 졸업할 때 이미 인체 모형보다 더 정확한 몸 조각을 만들었고, 로댕의 조수로도 뽑혔으니까요. 그는 이미 로댕처럼 조각할 수 있는 눈과 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왜 이렇게 만든 걸까. 로댕을 비롯한 과거의 조각가들은 키스를 조각할 때 두 사람이 입술을 맞대는 바로 그 순간의 광경을 조각했습니다. 하지만 브랑쿠시는 생각했습니다. ‘그저 똑같이 조각하기만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래서 브랑쿠시는 ‘키스하는 장면’이 아니라, ‘키스의 의미’를 조각했습니다. 두 사람이 잠시나마 하나로 이어져 연결된다는 것. 그렇게 브랑쿠시는 두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지 않고, 한 돌에 두 몸을 모두 조각했습니다.

물고기(1926). 비늘도 눈도 지느러미도 없다. 황동 표면이 번들거리고 유선형 곡선이 흐를 뿐이다. 브랑쿠시는 말했다.

물고기(1926). 비늘도 눈도 지느러미도 없다. 황동 표면이 번들거리고 유선형 곡선이 흐를 뿐이다. 브랑쿠시는 말했다. "나는 물고기의 번쩍임을 표현하고 싶었다." / 필라델피아 미술관

그렇다 하더라도 조각을 사실적으로 만들면 더 멋있지 않았을까요. 실력도 충분한데 말이지요. 하지만 브랑쿠시는 말했습니다. “물고기를 떠올릴 때 비늘 한 장 한 장을 생각하는가. 아니다. 나는 물속에서 헤엄치며 지나가는 그 속도, 희미하게 번쩍이는 그 모습을 생각한다. 만일 내가 지느러미와 눈과 비늘을 조각한다면 그 움직임은 작품에서 사라진다. 나는 물고기의 번쩍임을 표현하고 싶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비늘과 지느러미는 물고기의 겉모습. 하지만 브랑쿠시에게 있어 물고기는, 수면 아래에서 번쩍이며 스쳐가는 존재였습니다. 브랑쿠시는 그 모습을 봤을때의 감각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물고기’(1926)에는 비늘도 눈도 지느러미도 없습니다. 황동 표면이 번들거리고 유선형 곡선이 흐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어딘가 물고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물속에서 뭔가가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감각이 떠오르는 것이지요.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사람의 얼굴을 가장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건 사진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때,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는 건 증명사진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떤 웃음, 표정이나 온도, 느낌 같은 것들이지요. 브랑쿠시는 그런 것들을 조각으로 표현해 영원히 남기고 싶었습니다.

깎고 또 깎고

브랑쿠시가 이 원리를 가장 집요하게 밀어붙인 주제는 새였습니다. 시작은 1910년대, 루마니아 전설 속 황금새를 모티프로 한 ‘마이아스트라’였습니다. 이 조각에는 아직 새의 형태가 남아 있습니다. 부리와 발이 있고, 몸체의 윤곽만 봐도 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황금새’ 시리즈로 넘어가면 부리가 몸에 흡수됩니다. 발이 사라지고 깃털의 암시마저 지워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공간 속의 새’에 이르면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하나의 곡선만 남습니다.

마이아스트라(1910~12). 루마니아 전설 속 황금새를 모티프로 한 초기 새 조각. 부리와 발이 아직 남아 있다. 브랑쿠시는 여기서 20여년에 걸쳐 새의 형태를 계속 깎아내기 시작한다. / 뉴욕 현대미술관(MoMA)

마이아스트라(1910~12). 루마니아 전설 속 황금새를 모티프로 한 초기 새 조각. 부리와 발이 아직 남아 있다. 브랑쿠시는 여기서 20여년에 걸쳐 새의 형태를 계속 깎아내기 시작한다. / 뉴욕 현대미술관(MoMA)

황금새(1919~20). 마이아스트라에서 공간 속의 새로 가는 중간 단계. 부리가 몸에 흡수되기 시작하고 발이 사라졌다. /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황금새(1919~20). 마이아스트라에서 공간 속의 새로 가는 중간 단계. 부리가 몸에 흡수되기 시작하고 발이 사라졌다. /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공간 속의 새에 이르러 형상은 극도로 단순화된다.

공간 속의 새에 이르러 형상은 극도로 단순화된다.

브랑쿠시는 이 시리즈를 대리석과 청동으로 20년에 걸쳐 열다섯 점 넘게 만들었습니다. 같은 제목이지만 하나하나가 전부 다릅니다. 매번 부리를, 발을, 깃털의 흔적을, 무언가를 하나씩 더 덜어냈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새가 하늘로 솟구치는 순간의 힘, 그 움직임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브랑쿠시의 작품을 ‘추상 조각’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브랑쿠시는 분노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추상 조각 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다. 사물의 개념과 본질을 담은 조각을 하는 것이다.” 브랑쿠시에게 자신의 조각은 세상에서 가장 사실적인 조각이었습니다. 다만 그의 조각이 드러내는 사실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좀 더 깊은 곳에 있었을 뿐입니다.

브랑쿠시는 단순한 자연의 원리를 조각에 담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새의 알. 새의 알이 럭비공 모양인 데에는 배란과 산란에 작용하는 구조적 힘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브랑쿠시는 말했습니다. “자연은 불필요한 것을 덧붙이지 않는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재료와 상호작용하되 인위적인 힘을 최소화하고, 본질적인 형태에 도달해야 한다. 단순함을 목표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물의 진정한 의미에 다가갈수록 작품이 저절로 단순해질 뿐이다.

작업실에 앉아 있는 브랑쿠시.

작업실에 앉아 있는 브랑쿠시.

그리고 이 모든 조각을 브랑쿠시는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었습니다. 청동을 주조한 뒤에도 표면의 흠집과 결함을 직접 갈아냈습니다. 브랑쿠시에게 있어 예술이란 본질을 찾는 것. 그건 다른 조수가 아니라, 예술가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그는 말했습니다. 그 말대로 브랑쿠시는 정말로 노예처럼 일했습니다.

이것은 새인가

맨 처음, 문제의 재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927년 뉴욕 관세 법원. '공간 속의 새'가 예술인지 아닌지를 놓고 증인들이 법정에 섰습니다. 판사는 브랑쿠시 작품의 구매자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사냥을 나갔는데 저게 나무 위에 있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당신은 저걸 총으로 쏘겠습니까?” 당황한 구매자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다음으로 나선 브랑쿠시 측 증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가가 이것을 새라고 한다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측면을 보세요. 새의 가슴과 비슷한 곡선이 보입니다.” 그러자 판사는 말했습니다. “보트의 용골을 닮은 것 같기도 한데요.” 분위기는 좋지 않았습니다.

판결 당시 신문 보도. 해당 판결은 예술계에서 큰 이슈였다.

판결 당시 신문 보도. 해당 판결은 예술계에서 큰 이슈였다.

1928년 11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것은 새다.” 뜻밖의 결과였습니다. 판사는 판결문에 적었습니다. “추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예술의 흐름이 발전하고 있고, 법원도 이를 인정해야 한다. 이 작품은 전문 조각가의 독창적인 작품이며 새와 연관 짓기 어려울 수는 있으나 윤곽이 아름답고 균형 잡혀 있다. 따라서 예술작품으로서 면세 대상이다.” 비록 모두에게 이 작품이 새처럼 보이는 건 아니더라도 예술가의 뜻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브랑쿠시는 이를 모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재판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브랑쿠시는 파리의 아틀리에에서 50년을 살았습니다. 흰 작업복에 긴 수염, 직접 쌓은 벽난로에 직접 깎은 나무 가구. 고향 집과 다를 것이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1937년, 잠시 고향 루마니아로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곳에 그가 세운 ‘무한주’는 마름모꼴 형상이 끝없이 반복되며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29미터 높이의 주철 기둥입니다. 맨 꼭대기의 모듈은 계속 하늘로 이어질 듯이 반쪽으로 잘려져 있습니다. 전사자들의 무한한 희생은 끝나지 않고 기억된다는 상징입니다. 이 작품은 202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습니다.

무한주(1938). 마름모꼴 모듈이 반복되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29미터 높이의 주철 기둥. 맨 꼭대기는 반쪽으로 잘려 있다.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1차 세계대전 전사자들의 무한한 희생을 상징한다. 202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트르구지우 현지 촬영

무한주(1938). 마름모꼴 모듈이 반복되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29미터 높이의 주철 기둥. 맨 꼭대기는 반쪽으로 잘려 있다.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1차 세계대전 전사자들의 무한한 희생을 상징한다. 202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트르구지우 현지 촬영

1957년 3월, 브랑쿠시는 8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틀리에와 그 안의 모든 작품을 프랑스에 기증했습니다. 조건은 하나. 자신이 죽는 날의 상태 그대로 아틀리에를 재현할 것. 유언대로 복원된 아틀리에가 지금 파리 퐁피두센터 옆에 서 있습니다.

브랑쿠시가 열어놓은 길로 수많은 조각가가 뒤따랐습니다. 영국의 헨리 무어와 바버라 헵워스는 브랑쿠시의 방식을 이어받아 20세기 조각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모두 벗겨내고 순수한 형태만 남긴다는 것, 하나의 단위를 반복해서 쌓아 올린다는 원리는 훗날 미니멀리즘 작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분야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금속 곡선, 반복되는 기하학적 모양들. 그 첫 단추를 끼운 사람이 브랑쿠시였습니다.

브랑쿠시는 평생 조각을 깎고 또 깎았습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겼습니다. 그의 삶도 그랬습니다. 결혼한 적도 없고, 회고록도 쓰지 않았습니다. 남은 건 아틀리에 하나와 그 안의 조각들뿐이었습니다.

마드모아젤 포가니 III(1931). 헝가리 화가 마르기트 포가니의 초상. 브랑쿠시는 버전 I(1912)에서 시작해 점점 여러 요소들을 깎아 나갔다. 결국 작품에서 포가니의 얼굴은 사라지고, 브랑쿠시가 생각한 '여성의 본질'이 남았다.

마드모아젤 포가니 III(1931). 헝가리 화가 마르기트 포가니의 초상. 브랑쿠시는 버전 I(1912)에서 시작해 점점 여러 요소들을 깎아 나갔다. 결국 작품에서 포가니의 얼굴은 사라지고, 브랑쿠시가 생각한 '여성의 본질'이 남았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무리 높은 자리에서 훌륭한 이력을 많이 남겼다고 해도 그건 건조한 숫자와 글자에 불과합니다. 정말 중요한 건 기록으로 남지 않는 것들입니다.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 즐거운 기억. 그 사람을 떠올릴 때 이력서 대신 먼저 떠오르는 어떤 웃음, 어떤 분위기, 그날의 공기 같은 것. 브랑쿠시는 돌을 깎아 바로 그런 것들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내 작품에서 난해한 공식이나 신비를 찾지 마라. 내 조각을 계속 바라봐달라. 내가 주고 싶은 순수한 기쁨이 그 안에 있다.”

*그가 탄생한 2월 19일은 루마니아의 공휴일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번 기사는 Brancusi: A Study of the Sculpture (Sidney Geist 지음), Constantin Brancusi: A Survey of His Work (Sanda Miller 지음), Brancusi vs. United States: The Historic Trial, 1928 (Margit Rowell 지음), Constantin Brancusi: 1876–1957 (Friedrich Teja Bach·Margit Rowell·Ann Temkin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이게 무슨 작품이냐"...'수백억 명작', 세금 폭탄 맞은 사연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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