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케이스 스터디 - 코오롱인더스트리 FnC
‘이것은 단지 패션이 아니다(This is not just fashion).’ 지난 4월 화창한 어느 날, 이런 문구가 적힌 코오롱인더스트리 FnC 부문(이하 코오롱FnC)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 래코드 매장을 방문했다. 래코드는 한자로 래(來);코드, 영어로는 RE;CODE로 새로운 코드를 입힌다는 뜻을 지녔다.
매장 안에는 래코드가 기존 코오롱FnC 재고 상품을 업사이클링하고 지속가능한 소재를 사용해 창의적 컬렉션을 디자인·생산하는 브랜드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업사이클링은 친환경 디자인이나 아이디어, 기술 등의 가치를 부여해 새로운 제품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매장은 폐기물을 최소화한 노출콘크리트 디자인으로 꾸미고 기와·목재 등은 모두 버려진 제품을 사용했다. 매장 내 깊숙한 곳에 위치한 ‘로프 소파’는 코오롱FnC의 쓰고 남은 로프로 만들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매장 안에는 이번 S/S 시즌 의류가 걸려 있었다. 그중 코오롱FnC 남성복 브랜드 캠브리지 멤버스의 양복 재고 상품을 새롭게 디자인한 여성용 재킷이 눈에 띈다. 위쪽은 분명 남성용 디자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허리를 잘록하고 길이를 짧게 만들면서 칼라에 셔링을 잡아 여성용으로 만든 것이다. 이 외에도 양복 안감이 밖으로 드러난 재킷, 남성 정장 재킷의 심지를 겉면에 부착한 원피스, 남성용 와이셔츠로 만든 치마(심지어 와이셔츠 한쪽 팔이 그대로 달려 있다), 좌우로 소재와 색깔은 물론 길이도 다른 언밸런스 셔츠 등이 눈길을 끌었다.
래코드 관계자는 기존 스타일보다 독특하면서 창의적 디자인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소매에는 한정판이라는 의미로 ‘Re; 리미티드’ 라벨이나 옷을 n개만 생산했다는 뜻으로 ‘Only n pieces were made(n개 한정으로 만들어졌음)’이라는 라벨을 달고 있다.
의류 재고로 업사이클링 시도
래코드는 지난 2012년부터 코오롱FnC의 업사이클링 브랜드로 탄생했다. 기본적으로 3년 이상 팔리지 않은 의류는 소각하는 것이 패션 기업의 관행이다. 그러나 질 좋은 원단 제품을 태우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라는 사내 인식이 확산되며 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코오롱FnC는 래코드 론칭 당시 기업들이 알리기를 꺼리는 폐기물 규모를 솔직히 공개했다. 코오롱FnC가 보유한 20여 개 브랜드에서 이미지 관리를 위해 소각하는 3년 차 재고 규모는 수십억 원 상당이다. 폐기물 처리 비용은 1톤당 24만 원 선이다. 1톤 가격은 재킷 한 벌 가격에도 못 미친다. 많은 이의 노동과 자원을 쓰고 탄소발자국을 남긴 의류가 의미 없이 다시 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의류 폐기물 문제를 해결하는 답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었다.
에코 패션은 그 답으로, 패션 산업의 화두 중 하나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린 컨슈머에게만 의존하면 산업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많은 실험적 브랜드가 사라져갔다. 친환경 캠페인뿐 아니라 상품성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래코드는 상업 브랜드 중에서는 가장 실험적이되, 친환경 브랜드 중에서는 가장 대중적인 디자인 정체성을 지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래코드는 프로젝트 첫 시즌에 자체 디자인팀을 두지 않고 독립 디자이너, 해외 친환경 패션 레이블과 협업했지만 일관성과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013년부터는 인하우스 디자이너 3명을 두고 래코드의 디자인을 관리한다. 지속가능한 패션을 말하기 전에 지속가능한 브랜드를 구축하는 데 신경 쓰고 있다.
넉넉하고 중성적인 실루엣, 실험적 디테일과 간결한 색채 등 래코드의 시그너처 스타일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재고 의류의 원형을 유지하되, 버려진 패션 부자재를 부착해 재미를 더한 ‘리나노(RE;Nano)’ 라인은 이런 환경에서 탄생했다. 리나노는 기존 래코드 컬렉션을 제작하고 남은 재고 의류 자투리와 부자재를 활용해 제로웨이스트를 구현하기 위해 기획한 라인이다. 재고 의류 업사이클링을 제안받아 협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2016년부터는 사람들이 업사이클링 패션을 체험할 수 있도록 고객들이 가져온 옷을 리폼해주는 ‘리콜렉션(Re;Collection)’ 시리즈를 선보였다. 현재 래코드 매장 한쪽에 마련한 부스에서는 옷을 가져온 고객의 요청대로 리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아들이 고인이 된 아버지의 옷을 가져와 리폼하거나 자신이 아끼는 옷을 아이 옷으로 리폼하는 등 고객의 사연과 추억이 깃든 옷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에어백, 카시트 등 의류 아닌 폐기물도 재탄생
래코드 매장 한쪽에 전시된 가방은 에어백으로 만든 것이다. 에어백이나 카시트는 코오롱FnC 제조사업 부문의 사업 아이템 중 하나로, 제작 과정 중 샘플이나 불량품, 폐기품을 인수받아 제품화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또 폐기 예정인 텐트, 군복, 낙하산 등을 육군·공군으로부터 매입해 세척과 해체 과정을 거친 뒤 업사이클링한 밀리터리 라인을 선보였다. 최근에는 고려대학교 의료원 및 미래기술원과 3자 MOU를 맺어 의사 가운 등 버려지는 의료 폐기물을 활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래코드는 경계 없는 탐구를 통해 팔지 못한 의류뿐 아니라 다양한 재료를 제품 만드는 데 활용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브랜드로 알려지면서 다양한 파트너와 협업하기도 했다. 현대차 아이오닉 첫 출시 기념 팝업 스토어에 전시하는 업사이클링 제품을 만들었고, KT와 함께 버려지는 임직원 유니폼을 모아 카드지갑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시몬스와는 매트리스 업사이클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유한킴벌리도 고객 사은품 제작을 맡기면서 레코드와 협업하는 등 다양한 곳에서 협업 의뢰가 들어온다.
해외에서도 입지를 넓히고 있다. 2016년부터 런던 프리즈 아트 페어와 베를린 캡슐쇼 등에 참여하며 국제적 인지도를 쌓은 래코드는 해외 편집숍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매장에 동행한 최유나 매니저는 이번 S/S 시즌 컬렉션이 마무리되며 해외에 납품할 제품 제작이 한창이라고 전했다.
환경문제는 특정 기업이나 개인의 과제가 아닌, 우리 모두 해결해야 할 공동 책임이다. 래코드는 사회적약자와 협업해 창의적이고 지속가능한 기회를 만들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공동체 기반을 다지고 있다. 래코드는 안양의 아틀리에에서 여성 난민에게 봉제 교육과 실습 교육을 제공하는 등 사회공헌에도 업의 독특한 결을 살리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모든 제품의 생애주기 관점에서 환경보호와 순환경제 촉진을 요구하는 지침을 발표했고, 의류 대기업의 미판매 의류·신발 폐기를 금지하는 규제를 적용할 예정이다. 이러한 변화는 패션 브랜드가 지속가능성과 사회적책임을 다하도록 요구한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강한 규제로 다가오는 시점에 래코드가 제안하는 소비는 단순히 ‘옷을 산다’는 행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환경을 지키는 책임의식, 연대 가치, 그리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선택으로서 가치 표명이다.
[인터뷰]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최유나 래코드 브랜드 매니저(BM, 팀장)
“소각 대신 옷에서 옷으로…한국 지속가능 패션 알릴 것”
- 래코드 브랜드를 간단히 소개한다면.
“래코드는 환경문제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앞서 2012년에 론칭한 패션 브랜드다. 국내 최초 나일론을 생산하기 시작해 자사가 운영하는 20여 개 브랜드의 3년 차 재고를 패션 회사다운 방식으로 스토리를 더해 살려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패션업의 고질적 문제인 재고를 활용한 업사이클링 기법과 지속가능한 소재를 사용해 타 패션 브랜드와 차별화되고 디자인적으로도 유니크한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 래코드가 다른 업사이클링 브랜드와 차별화되는 특장점은.
“팔리지 않아 소각 대상으로 분류된 재고를 선별해 수작업으로 해체·재조합한 후 창의적 컬렉션을 제작하는, 옷에서 옷으로(clothes to clothes) 방식의 업사이클 솔루션을 선보이고 있다. 의류뿐 아니라 에어백, 카시트 등 다양한 산업 소재를 사용하는 것도 우리 회사의 특징이다. 친환경과 디자인은 공생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많은데, 친환경이지만 독창적이고 유니크한 디자인 컬렉션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차별화 부분이 아닐까 싶다.”
- 독창성과 함께 품질을 꾸준히 유지하는 노하우가 있다면.
“우선 재료가 중요하다. 래코드 컬렉션은 자사 브랜드 제품인 만큼 기본적으로 품질 좋은 재고가 많다. 최근 럭셔리 브랜드의 데드스탁을 제공받아 다음 컬렉션에 활용할 예정이다. 이렇게 재고를 활용하는 리미티드 컬렉션의 경우 해체부터 봉제까지 래코드 아틀리에 장인의 수작업을 거쳐 완성도 또한 꾸준히 유지될 수 있다.”
- 다양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2022년부터 브랜드 론칭 10주년을 기념해 시작된 ‘리콜렉티브’ 이니셔티브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공통 철학을 공유하고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 다양한 아티스트와 브랜드가 참여하는 프로젝트다. 2022년 10주년 기념 전시를 시작으로 2023년 밀란 디자인 위크에 참여해 지속가능 어워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2024년에는 서도호 작가와 협업했고, 프리즈 서울을 기념한 우한나 작가와의 토크 세션, 김하늘·오상민 작가와의 업사이클링 전시를 주최했다. 래코드는 아트 신 등 여러 분야와 협력해 지속가능한 패션과 그 철학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 최근 래코드에서 집중하는 새로운 기획이 있는지.
“2025년에 전개하는 ‘Declare Yourself’ 캠페인은 2012년 론칭 이후 국내를 대표하는 업사이클링 브랜드로서 13년간 지속가능의 본질을 지켜온 래코드처럼 다방면에서 스스로 길을 정의하고 독창적이면서 지속가능한 가치를 창출하는 인물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했다. 래코드는 인물을 관통하는 각각의 키워드를 선정하고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과 협업해 철학을 담은 인터뷰 콘텐츠를 선보일 예정이다. 첫 번째 인물은 ‘모수 서울’ 안성재 오너 셰프로, 그의 철학과 정체성을 반영한 특별한 셰프 의상을 제작했다. 올 하반기까지 새로운 협업이 예정되어 있다.”
- 래코드에 대한 해외 반응은 어떤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래코드의 해외 세일즈는 매년 성장하고 있으며, 얼마 전 영국 섬유패션협회에서 래코드를 주목해 대표적 업사이클링 브랜드로 사례를 소개하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부각되고 있다. 지속가능성을 확장하는 해외시장에도 래코드를 알리기 위한 활동을 이어나가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에서도 존재감 있는 브랜드가 되고자 한다.”
구현화 기자 ku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