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끊긴 귀국행 비행기…삶의 반전이 시작됐다 [서병철의 은퇴 후 잘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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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섬에서 바라본 테이블 마운틴. ©서병철

로빈 섬에서 바라본 테이블 마운틴. ©서병철

인생은 때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반전을 선사한다. 영화 <식스 센스>의 결말이 우리에게 짜릿한 전율을 주듯, 여행지에서의 예기치 못한 사건은 삶의 궤적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최근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겪은 일은 나에게 그런 ‘충격적인 반전’이자, 생을 바라보는 시선의 확장이었다.

오래 머물고 싶은 천국 같은 케이프타운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자마자 든 생각은 ‘왜 이곳에 이제야 왔나’였다. 아프리카의 도시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산은 원래 삼각형 모양으로 뾰족하기 마련인데, 독특한 길쭉한 테이블 모양의 산인 '테이블 마운틴'의 비현실적 모습에 압도됐다. 구름이 낀 흐린 날이면 아예 자취를 감췄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르면 약 3km에 달하는 평평한 고원을 마주한다. 360도 파노라마 뷰를 만끽하면서 구석구석을 트레킹했다. 그곳에서 남아공의 국화인 킹 프로테아(King Protea), 척박한 땅에서 재생 능력이 큰 관목인 핀보스(Fynbos) 등 다양한 식물들도 만났다. 잠시 휴식을 취할 겸 뷰 맛집에서 마시는 차 한잔은 여유로운 호사였다.

반드시 체험해 볼 것도 있는데 시티 사이트싱(City Sightseeing) 버스다. 일반적인 시내 주요 지점을 다니는 관광버스가 아니다. 테이블 마운틴을 끼고 있는 자연 식물원인 커스텐보스(Kirstenbosch) 식물원, 캠즈 베이(Camps Bay)와 시포인트(Sea Point)를 지나는 진정한 '사이트싱' 버스다.

언덕 가파른 곳에 지은 바다 전망의 값비싼 저택에서 수영을 즐기며 바다를 바라보는 부유한 집주인의 유유자적한 모습에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정류장에 내려서 3층 카페에 앉아 모히토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봤다. 일광욕을 즐기는 연인들, 거친 파도를 즐기는 꼬마들의 모습, 길거리에서 펼쳐지는 아프리카 전통 의상을 입은 어린 친구들의 흥겨운 춤사위. 여기가 천국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다 전망의 값비싼 저택이 즐비한 캠즈 베이. ©서병철

바다 전망의 값비싼 저택이 즐비한 캠즈 베이. ©서병철

환상적인 여정 끝 아쉬움을 뒤로하고 귀국 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럴 수가. 갑자기 항공편 취소라는 방송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침공으로 인해 경유지 도하가 위치한 카타르 영해가 폐쇄 결정이 났기 때문이다. 일행 모두 멘붕이었다.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전쟁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언제 돌아갈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가장 힘들었다.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고마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긍정 회로를 돌렸다. 귀국이 늦어진 불운이 어쩌면 행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결국 케이프타운 당초 예정했던 4박이 아닌, 무려 2주간의 체류가 됐다.

내 마음에 들어온 한 거인

그 순간부터 여행의 반전이 일어났다. 오히려 시간적 제약 때문에 가지 못했던 여행지와 체험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먼저 넬슨 만델라가 18년간이나 수감되었던 역사적인 곳, 로빈 섬으로 향했다. 섬 입구에는 이런 푯말이 있다. ‘우리는 로빈 섬에서 복역하는 것이 자랑스럽다.’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이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말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었던 ‘노동이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라는 문구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죄수를 회유하려는 의도였을 텐데, 오히려 더 분노와 적개심이 불타오르지 않았을까. 만델라가 갇혔던 독방과 노동했던 장소를 차례로 둘러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졌다.

집에 두고 온 아내와 두 딸에 관한 그리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인해 심각한 박해와 차별을 당하고 있는 흑인들에 대한 안타까움 등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감내하며 그 오랜 세월을 견뎌냈을까. 지금은 그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존경할 만한 거인의 존재로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넬슨 만델라 감옥 독방_로빈 섬. ©서병철

넬슨 만델라 감옥 독방_로빈 섬. ©서병철

로빈섬을 나와, 남아공 인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둘러볼 수 있는 이색적인 'La Gu Gu 타운십'(Township) 프로그램을 택했다. 일종의 다크 투어(Dark Tour)로, 랑가(Langa)라는 케이프타운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도 둘러볼 수 있다. 그런데 통행증(혹은 레퍼런스 북)을 보며 경악했다.당시 2500만 유색인의 이동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국민 전체를 비(非) 개인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신분증명서나 다름 없던 것이다. 방문한 곳은 과거 백인, 흑인, 유색인 등을 구분해서 살게 만들었던 마을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함석집에는 수도와 화장실이 없어 공용 화장실과 공용 수도시설을 사용하고 있었다. 여러 명이 함께 지내는 집은 내부 공간이 좁고 열악했다.

반면에 길 건너편에는 자기 자본으로 쌓아올린 멋진 집들이 즐비했다. 어떻게 같은 지역에서 이런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지난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는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여행자의 시선에서는 여전히 인종 차별과 빈부 격차가 지속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연히 들른 유치원에서 코흘리개 아이들이 신기하게 나를 쳐다보는 천진난만한 모습만이 현실과 동떨어진 듯했다.

쓰러져가는 함석집들_La Gu Gu 타운십 프로그램. ©서병철

쓰러져가는 함석집들_La Gu Gu 타운십 프로그램. ©서병철

여행의 긍정적인 후유증

케이프타운은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기도 했지만, 감옥과 마을을 둘러본 후 먹먹한 마음도 컸다. 이런 시간을 잠시 보냈다고 해서 어떻게 이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현재 이들의 삶의 이면에는 엄청나게 길고 힘든 투쟁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도미니크 라피에르(Dominique Lapierre)의 저서 <검은 밤의 무지개>에서 랑가 마을의 은인이자 언어치료사인 헬렌 리버만(Helen Lieberman)이 한 고백이 머릿속을 맴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내 나라 주민들을 물리적으로만 나눠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증오를 심어 놓았다.”

누구나 여행 후에는 후유증을 겪는다. 남아공 여행의 후유증은 따지자면 '긍정적 후유증'에 가까웠다. 나 자신을 벗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향하게 되는, 자기 시선의 확장이라는 선물을 얻었으니 말이다. 물론 실천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 큰 '마인드 무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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