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세계 최초이자 유일하게 탄생 관련 기록을 보유한 문자다. 창제자와 창제 목적·원리가 정확히 문헌에 남아 있다. 특히 '훈민정음'에 적힌 창제 목적은 '애민정신'으로 요약되며 한글의 창제자 세종을 성군으로 추켜세워주는 기록이 됐다. 그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문자가 없어 뜻을 못펴는 '어리석은 백성'이 가엾어 28자를 친히 만드신 어진 임금이었다. 그런데 과연 권력의 최정점에 위치한 '전제군주'이기도 했던 세종은 백성들의 언로가 트이길 진정으로 원했을까.
부산대 한문학과 명예교수인 저자 강명관의 신간 '한글, 불편한 진실'은 한글의 창제 목적이 적힌 훈민정음 '어제서문'과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를 중심으로 세종이 백성의 '말할 권리'를 위해 한글을 창제했다는 통념을 전복한다. 한글 창제 전후로 세종과 신하의 언행, 제도적 변화 등을 분석해 한글의 목적이 지배층의 원활한 통치에 치우쳐져 있었음을 고발한다.
저자에 따르면 훈민정음 어제서문에서 세종이 상정한 '말하고자 하는 백성'은 주로 지방 관아의 수령과 갈등을 빚는 민중이다. 규정을 초과해 공물을 수탈하고, 형벌권을 남용하는 수령에 맞서 백성은 상급기관에 '고소'로 대응했다. 조선은 이를 법으로 보장했다.
문제는 세종이 통치한 이후였다. 한글 창제 전인 1419년 세종은 '부민고소금지법'을 제정해 민중의 입을 틀어막았다. 신하가 왕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처럼, 수령과 백성도 그와 같은 '군신 관계'에 놓여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조치였다. 권력에 저항할 길을 틀어막은 상황에서 글자가 있다 한들 바뀌는 것은 없었다. 세종의 의중이 애민(愛民)보다 원활한 통치에 기울어져 있었다고 볼 근거다. "그(세종)는 자신이 지배계급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지배계급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백성들이 통치자의 뜻을 알아듣게 하는 데 한글 창제의 목적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마저도 보급과 교육이 제대로 안 돼 한계가 분명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목판으로 제작됐던 한글의 사용설명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민중용으로 만들어진 적은 없으며, 지방에서 중앙 관서의 하급 관료인 '서리' 역할을 했던 향리에게도 한글을 가르치는 과정이 없었다는 것.
백성들이 권력과 갈등을 빚는 주요 무대가 지방이었음을 감안하면 한글의 전파 통로가 될 수 있는 향리마저도 소외돼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한글의 실수요자는 조선의 지배계층이자 중앙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신분적 특권을 누린 사족(士族)이었다. 한문으로 된 유교 경전을 쉽게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글'을 적극 활용했다. 가령 조선은 중국에 대한 사대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중국어 학습을 적극 권장했고, 사족 관료들은 '표음문자'라는 한글의 강점을 바탕으로 중국어 발음을 익혔다.
책은 풍부한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어제서문'에서 애민정신으로 읽힐 수 있는 세종의 글을 문구 단위로 하나하나 논파한다. 백성을 대하는 세종의 인식을 따라가다 보면 자애로운 성군보다 구중궁궐에서 백성을 통치의 대상으로 굽어보는 근엄한 절대군주의 초상이 읽힌다.
[최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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