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자 노리는 유사수신 사기
노후불안∙가상자산 투자 유혹
투자 빙자 사기 1년간 60%↑
피해자 10명 중 4명 환갑 넘어
작년 한해 피해액만 1.11조 원
지인에 투자 권유하며 피해 확산
‘원금 보장에 하루 0.6% 이상 수익률’ ‘시니어 고객을 위한 특별 설계’ ‘노후 복리’…. 가상자산 투자를 빙자한 유사수신 사기단이 노인들을 유혹한 문구들이다.
이 같은 사기 사건이 최근 1년 새 60% 이상 급증했는데, 피해자 10명 중 4명은 환갑을 넘은 고령자였다. 고령층의 ‘노후 불안’이 가상자산 시장 활황에 따른 ‘대박 유혹’과 맞물리며 가상자산 투자 빙자 사기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다. 5월 가정의달을 어둡게 하는 단면이다.
정부가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고 있지만 피해자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단속도 중요하지만 피해 예방을 위한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4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양부남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유사수신 형태의 가상자산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자는 최근 5년간 2만5845명에 달한다. 작년 한 해에만 피해자가 8206명에 이르고, 피해 금액은 1조1109억원으로 파악됐다. 이는 가상자산이 활용된 사기 범죄 피해만 별도 집계한 수치다.
2021년부터 국무조정실을 중심으로 경찰·금융위원회 등 6개 기관이 특별단속을 벌이며 가상자산을 이용한 사기 범죄 근절에 나섰지만 피해 금액은 매년 1조원을 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발생한 유사수신 사기의 대표 피해자 중 40%가 61세 이상 연령대로 집계됐고, 51~60세 연령대가 30%로 뒤를 이었다. 사기 조직이 이들의 노후 불안과 자산 증식 욕구를 동시에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금리로 인해 예금 이자로 생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원금을 보장하고, 매일 고정수익을 지급한다는 점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고령층을 표적으로 삼은 유사수신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연령층에 비해 이들을 속였을 때 ‘성과’가 크기 때문이다. 고령층은 다른 연령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금액을 한번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고, 일단 신뢰를 갖게 되면 지속적으로 투자금을 늘리는 경향도 강하다.
또 고령층은 디지털 환경에 익숙지 않은 탓에 가상자산 사기 구조의 실상을 인지하는 데도, 피해 발생 후 신속하게 대응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사기 조직이 최신 정보기술 용어를 조합한 허황된 사업 비전을 제시해도 고령층은 쉽게 넘어간다. 피해자들은 한동안 수익을 실현하며 믿음을 키우고 큰돈을 쏟아붓다가 출금이 정지되는 사태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형사기동대가 최근 검찰에 송치한 폰지 사기 일당은 가상자산 간 ‘블록딜 스왑(대규모 맞교환)’ 거래 중개로 매일 2%의 수익을 지급하겠다고 속였다. 실체가 없는 사업이었지만 이들 일당은 2023년 12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투자자 1408명을 모집해 328억원을 가로챘다.
사기 조직의 속임수는 나날이 정교해지고 있다. 해외 기업을 사칭하는 사기 일당을 예로 들면 영문으로 된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가상의 경영진을 꾸며내는 것은 물론 공신력 없는 해외 정보매체에 기사 형식의 회사 소개 글을 싣는다. 사기 일당은 유령 업체를 국내에 소개할 때 이 같은 자료를 재활용한다. 일부 피해자는 의심을 품고 인터넷에서 사기 업체에 관한 정보를 찾아나섰다가 오히려 신뢰를 갖게 된 경우도 있다.
특히 다단계 구조로 이뤄지는 경우가 대다수인 까닭에 피해 범위가 넓을 뿐 아니라 피해자·가해자 간 경계도 불분명하다. 고수익·원금 보장 약속을 철석같이 믿은 피해자들은 자신만 피해를 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변에 투자를 권유해 피해자를 양산하는 데 일조한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기 불안정성이 커지며 부동산 등 실물자산 보유 여부에 따른 자산 불평등이 심해졌다”면서 “뒤처진다는 생각에 고수익 유혹에 취약해진 이들이 늘었다. 범죄 특성상 피해 회복이 어려운 만큼 예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