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바다 위 무법자들, 계몽의 닻을 올리다

6 hours ago 2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계몽주의’는 인간의 합리적인 사유와 이성의 계몽을 내세운 철학 사조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 18세기 서구에서 활동한 이들이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힌다. 그런데 이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계몽주의를 실험한 이들이 있다. 바로 해적이다.

미국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저서 ‘해적 계몽주의’를 통해 제시하는 이색적인 주장이다. 흔히 계몽주의를 서구의 산물로 여기지만, 저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동안 은폐되고 무시됐던 계몽주의의 비(非)서구적 기원, 바로 ‘원형적-계몽주의’가 역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해적과 마다가스카르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수천 명의 해적이 마다가스카르 북동부 연안을 자신들의 거처로 삼았고, 여기서 최초의 계몽주의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해적들의 민주적인 통치 방식과 마다가스카르 정치 문화의 평등주의적인 요소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한 것이었다.

저자는 계몽주의를 “서구의 몇몇 지식인이 만든 게 아니라, 전 세계를 종횡무진 했던 대화와 논쟁, 사회적 실험들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해적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기에 각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새로운 제도를 신속하게 창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계몽주의와 함께 민주주의를 실험하기에 완벽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역사학자들 중 일부는 북대서양 세계에서 계몽주의 정치가들이 발전시킨 민주주의 형태의 일부가 1680년대에서 1690년대 사이 해적선에서 먼저 시도됐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흉포한 이미지의 해적들이 사실은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선도하면서 계몽주의를 시도했다는 분석이 흥미롭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