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식인종 중 노예를 골라 비용을 충당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매우 야만스럽지만 모든 용도로 사용할 수 있으며, 균형 잡힌 몸매에 머리가 아주 좋습니다.”
15세기 말 신대륙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카리브해 섬 원주민들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의 눈에 이들 원주민은 유럽인을 위한 ‘신대륙 특산품’에 불과했다.
영국 셰필드대 국제역사학 교수 캐럴라인 도즈 페넉이 쓴 <야만의 해변에서>는 이 같은 유럽 중심적 관점을 뒤집어 원주민을 대항해 시대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조명한다. 식인 풍습을 가진 야만인, 노예로 전락한 피해자로 대상화되던 원주민이 유럽의 침략에 어떻게 대응하고 유럽 문명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색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풀어낸다.
아스테카 문명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는 탄탄한 자료 조사를 기반으로 원주민의 삶을 생생히 그려냈다. 원주민은 피정복지의 약자로만이 아니라 외교사절이자 중재자, 유럽인의 가족으로서 다양한 삶을 살아갔다. 노예가 된 원주민은 자유를 되찾기 위해 법정에 서고, 유럽 왕궁에 입성한 귀족 출신 원주민은 유럽인과 동맹을 맺어 다른 지역 탐사에 동행하기도 했다.
젊은 원주민 중에선 대서양 횡단을 새로운 기회로 삼아 유럽 사회에 동화된 사람도 있었다. 유럽인의 통역을 맡은 원주민들의 흔적도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럽인의 침략을 미화하진 않는다. 원주민이 대서양을 건너며 겪은 고초와 유럽인의 가혹 행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카카오, 감자, 토마토 등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식재료의 역사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야 족장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545년 스페인 펠리페 왕자에게 고향의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선물 중 하나로 초콜릿을 준비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유럽에서 발견된 초콜릿 음용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이외에도 고구마는 콜럼버스가 1493년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섬에서 가져왔고,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토마토는 이탈리아인의 정원에 심겨 이들의 주 식재료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책은 원주민에 대한 잘못된 인식도 바로잡는다. 저자는 “원주민에게 배타적인 사유재산 개념이 없다는 생각은 그들의 권리와 영토를 찬탈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동원됐다”며 “(그러나) 그들에게는 소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었고, 그 가치가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강조한다.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쓴다. 책은 대항해 시대 역사에서 지워진 원주민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