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몸-사랑-죽음… SF 작가들을 빨아들인 ‘블랙홀’

6 hours ago 3

공상과학 단편소설집 2권 출간
김초엽-천선란-김혜윤-김청귤 등… 최근 가장 주목받는 작가들 참여
한중 합작 앤솔로지 ‘다시, 몸으로’… 과학 발전 속에서 육체 가치 생각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김초엽·천선란·김혜윤·청예·조서월 지음/324쪽·1만7000원·허블
◇다시, 몸으로/김초엽·김청귤·천선란·저우원·청징보·왕칸위 지음/308쪽·1만7500원·래빗홀


최근 SF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들이 필자로 참여한 SF 소설집 두 권이 새로 나왔다. 위쪽부터 김초엽 천선란 김혜윤 조서월. 허블·래빗홀·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제공

최근 SF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들이 필자로 참여한 SF 소설집 두 권이 새로 나왔다. 위쪽부터 김초엽 천선란 김혜윤 조서월. 허블·래빗홀·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제공


높이 20m 초거대 달팽이를 클라이밍으로 오르는 인간.

김혜윤 작가의 공상과학(SF) 단편소설 ‘오름의 말들’에 나오는 장면이다. 대체 무슨 조화일까. 40쪽이 채 안 되는 분량에 이처럼 낯선 이미지들을 풀어놓았는데 어느새 세계관에 젖어 들게 된다.

18일 개막한 서울국제도서전을 앞두고 매력적인 SF 소설집 두 권이 새로 나왔다. 김 작가를 비롯해 한국과학문학상 역대 수상자 5명이 참여한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와 한국·중국 작가 6명이 몸에 대한 사유를 펼친 ‘다시, 몸으로’다.

다시 달팽이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뚝 떨어졌다. 겉껍데기는 암석처럼 단단하고 속살은 부드러웠으며, 배를 밀어 하루 100m를 이동했다. 이 외계 생명체와 그나마 닮은 동물을 찾자니 달팽이였다.

초거대 달팽이의 몸 전면에는 따개비 같은 돌기 수백 개가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 정체 모를 외계 생명체와 대화하기 위해 언어학자, 암호학자가 총동원됐다. 이들은 돌기에 ‘손을 대면 1, 떼면 0’이란 식의 이진법 소통 방식을 고안하고 이진법 언어를 클라이밍과 접목했다. 로프를 매달고 달팽이를 타고 올라가 맨손으로 돌기에 손을 올렸다 떼는 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한 것. 어느새 달팽이와 정이 든 이들은 정부가 외계 생명체를 생체 실험하려고 하자 ‘지구를 떠나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20m 높이 꼭대기에 오른다.

소설을 읽다 보면 때로 SF가 현실을 오히려 효과적으로 보여줄 때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인간이 까마득한 높이의 달팽이 암벽을 맨몸으로 오르는 모습은 현실의 고공 농성을 떠오르게 한다. 김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소설을 쓰는 내내 고공 농성 중인 노동자들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며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매번 압도된다”고 고백했다.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에는 김 작가 외에도 최근 SF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김초엽·천선란·청예·조서월 작가가 참여했다. 편집부는 이들에게 “지금 가장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서로 의견을 나누지 않았음에도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죽음과 사랑을 주제로 썼다. 천 작가는 ‘우리를 아십니까’에서 존엄사를 앞둔 주인공이 좀비에 물려 인간도 좀비도 아닌 존재로 깨어난 상황을 그린다. 오랜 혼수 끝에 눈을 뜬 주인공은 아내가 남긴 녹음기를 들으며 자신이 혼수상태일 때 홀로 남은 아내가 자신을 어떻게 보호했는지 알게 된다. 좀비들의 땅으로 변해버린 지구에 덩그러니 놓인 두 사람. 지극한 고독 속에서 사랑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중 합작 앤솔로지 ‘다시, 몸으로’에는 김초엽·김청귤·천선란·저우원·청징보·왕칸위 작가가 참여했다. 제목이 암시하듯 몸이 주제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이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는 이야기가 그간 SF의 주된 흐름이었다면, 신간은 반대로 몸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김초엽 작가의 ‘달고 미지근한 슬픔’은 육체를 버리고 양자 큐비트의 세계로 이주한 신인류를 그린다. 무한정의 자유를 누릴 것으로 기대했던 인간들은 그러나 물리적 현실이 없는 세계란 근본적으로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허무에 빠진다. 허무에서 도망치기 위한 위장 행위로서 무언가에 몰두한다. 그렇다면 몰입이 깨진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이기에 만끽하는 자유는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두 소설집의 필자들이 일부 겹치지만, 같은 SF여도 이렇게 색깔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 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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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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