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새 문명 여는 文… 한글이 ‘AI 적응 강국’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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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발생 이후 전파 과정에서 일어난 정치-문화-종교적 교류 살펴
“전 세계 문자 중 가장 쉽고 편한 한글, 디지털 혁명 적응 속도 높여”
미국 출신으로 영어가 모어인 저자,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로 써내
◇문자 전파담/로버트 파우저 지음/512쪽·3만5000원·혜화1117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대부분은 라틴 문자(로마자)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벨기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데, 문자는 같은 라틴 문자를 쓴다. 반면 인도에선 헌법상 공용어로 인정된 22개 언어 중 상당수가 서로 다른 문자 체계를 사용한다. 이처럼 ‘문자’는 국경이나 언어의 경계와는 또 다른 차원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문자 전파담’은 문자가 어떻게 생겨나고 전파됐는지, 그 역사를 돌아본 책이다. 저자는 외국어 전파 과정을 통해 세계사를 살핀 책 ‘외국어 전파담’으로 2018년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미국인으로 영어가 모어인데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내며 한국어로 책을 집필해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이슬람 사원에서 절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벽감인 미흐랍이 화려한 아랍 문자로 장식된 모습. 혜화1117 제공

이슬람 사원에서 절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벽감인 미흐랍이 화려한 아랍 문자로 장식된 모습. 혜화1117 제공
이번 책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로 집필했다. 저자는 “영어로 먼저 쓴 뒤 한국어로 번역하거나 인공지능(AI)에 번역을 맡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며 “그렇게 했을 때 남아 있는 ‘번역 투’가 거슬리고 한국 독자에게 ‘실례’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신간은 ‘문자로 보는 세계사’란 주제에 충실하다. 기원전 3200년경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에서 만들어진 쐐기 문자부터 스마트폰 사용과 함께 활발히 쓰이는 이모지, AI의 암호화 문자 체계까지. 다양한 세계의 문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퍼졌는지를 짚는다.

특히 ‘문자가 발생한 지역이 더 우월한 문명을 갖고 있다’거나 ‘특정 지역이 변방의 문자 문화를 이끌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문자의 역사를 살펴보는 점이 흥미롭다. 세계 곳곳의 문화권들이 큰 제국과 종교의 패권 속에서도 어떻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문자를 수용하고 변형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했는지를 수평적인 시각에서 전개한다.

문자의 긴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전파 과정에서 일어난 정치·문화·종교적 교류를 살펴볼 수 있다. 언어는 인간이 태어나며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지만, 문자는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익힌다. 이 때문에 자동적으로 확산되지 않고 받아들이는 쪽의 선택과 저항이 일어난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문자는 소수 문명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류 전체가 공동으로 일구어 낸 하나의 ‘모자이크화’란 사실을 알게 된다.

세종이 1443년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례본.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세종이 1443년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례본.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한글이 갖는 지적 가치도 새롭게 조명했다. 기존 학계에서 한글은 독창적인 제작 원리를 가진 문자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저자는 ‘전파’에 방점을 두고 한글이 주변 문화권의 문자 구조와 주체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진화한 결과물임을 규명한다. 저자는 “(집필 과정에서) 커다란 중국 문명 바로 곁에서 문자를 만들고, 오랫동안 이어진 외세의 억압을 이기며 계속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문자의 역사를 공부할수록 한글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문자 가운데 가장 쉽고 편한 문자라고 생각하게 됐다는 점도 짚었다. 한국은 일찌감치 디지털 혁명에 적응하며 2000년대 인터넷 강국이 됐다. 2010년대엔 소셜미디어와 게임 보급률도 매우 높았다. 그리고 2020년대에는 AI에 가장 빨리 적응한 나라로도 꼽힌다. 이런 배경엔 쉽고 효율적인 문자인 한글이 크게 도움이 됐다고 봤다.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에서 저자는 과거엔 한글전용주의와 거리를 뒀지만, 이젠 한국에서 굳이 한자나 한문을 배울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 책을 쓰면서 뜻밖에도 완전한 한글전용주의자로 새로 태어났음을 고백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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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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