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는 은하수왕 내려온 신궁”… 고대 우주관 정립한 15년 집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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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자연학’ 발간 김일권 교수
첨성대 井 모양, ‘은하수’의 통로… 신라 김씨왕조 관련 신화 뒷받침
개기일식 등 천문현상으로 설화 고증
“알에서 태어났다? 사실 검증 못해… 실증 넘어 ‘경험주의 역사학’ 필요”

삼국사기 속 천문과 기상, 신화, 제사 등을 인문학과 과학으로 연구해 ‘삼국사기 자연학’(1∼7권)으로 집대성한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삼국사기 속 천문과 기상, 신화, 제사 등을 인문학과 과학으로 연구해 ‘삼국사기 자연학’(1∼7권)으로 집대성한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무명(無名)은 천지의 시작이고,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머니’(노자 ‘도덕경’)라고 했습니다. 기록된 유명의 역사 뒤를 받쳐 온 무명의 역사를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지난달 26일 경기 성남시 연구실에서 만난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62·민속학 전공)의 말에선 은근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김 교수는 ‘삼국사기’를 ‘역사자연학’이란 분석 틀로 집성한 연구서 ‘삼국사기 자연학’ 1∼7권(한중연 출판부)을 최근 발간했다.

삼국사기에서, 고대 한국인이 자연을 관찰하고 시간을 계산하며 징조를 해석하고 국가 의례를 조직한 방식을 재구성해 낸 역작이다. ‘국가 석학’이라고도 불리는 한국연구재단 우수학자(인문학)에 2011년 선정된 뒤 본격적으로 시작한 연구가 15년 만에 200자 원고지 1만6400장에 이르는 대작으로 결실을 맺은 것. 고대 한국인의 장엄한 우주관과 고대인의 삶을 지배했던 대서사시가 이 책을 통해 되살아난다.

● “은하수왕 시조인 신라 건국신화” 고대사 새 지평 개척

김 교수는 소지왕이 박혁거세의 시조묘를 혁파하고 487년 신궁(神宮)을 창립한 것을 기점으로 신라 천년을 전반기(시조묘 시대)와 후반기(신궁 시대)로 구분한다. ‘신궁’의 중요성을 알려면 여러 비석에 성한왕(星漢王)으로 기록된, 당대 신라인들이 ‘태조’로 여겼던 인물이 누군지부터 알아야 한다.

“천문과 신화학을 잘 모르면 해석이 꼬이는데, 성한왕은 ‘은하수왕’이란 뜻이에요. 문무왕릉비(682년)엔 15대조이며 별들의 왕인 은하수왕이 하늘에 천궁과 땅에 선악(仙岳)을 만들고, 선령(仙靈)으로 내려온 뒤 신라 옥란(玉欄)의 왕궁에서 나라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김씨 왕력(王歷)으로 환산하면 15대조는 첫 김씨 왕인 미추왕입니다. 박, 석, 김씨 가운데 김씨가 왕을 세습하게 되면서 미추왕을 시조로 하는 제2의 건국 신화가 생겨났던 것으로 볼 수 있어요.”

김씨 왕들은 즉위 이듬해 정월이나 2월에 신궁에서 즉위식이자 신년 제천 의례를 치렀다.“신라인들은 신왕의 대관식 의례 때 별들의 궁전에서 조상인 은하수왕이 내려와 김씨 왕조의 새 왕을 인정하고 보호한다고 믿었을 겁니다. 은하수는 별의 물이잖아요. 물이 하늘에서 흘러내리려면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첨성대는 맨 위가 ‘井’(우물 정) 모양일 뿐 아니라, 호리호리한 형태가 영락없이 우물을 닮았지요. 첨성대에서 ‘하늘 우물’ 신화가 재현됐던 것입니다.”

김 교수는 “첨성대가 바로 신궁”이라고 단언했다. 이는 박혁거세가 태어난 경주 나정(蘿井)을 신궁으로 여기는 통설과는 다른 견해다. 김 교수에 따르면 ‘김씨 성역’은 반월성에서 미추왕릉에 이르는 공간으로, 나정에서 오릉에 이르는 ‘박씨 성역’과 구분된다. 김씨 성역의 정중앙에 첨성대가 있다. ‘신궁원(神宮園)’이라는 표현도 신궁이 첨성대 주변처럼 넓은 들판에 있었다는 걸 뒷받침한다.

“신궁은 동아시아에서도 신라가 가장 먼저 만든 것인데, 이런 이야기가 ‘삼국유사’가 쓰일 당시에도 이미 잊혔던 겁니다.”

김 교수는 “나라의 구심점이 되는 신궁 제사 시행을 기점으로 새로 우역(郵驛·현대의 우체국)을 설치하고 도로를 정비하는 한편 시장을 개설하는 등 물적으로도 일신한 모습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 “신라인도 휴일 즐겨” 고대 시간 재구성

신라 아달라왕 4년(157년) 동해 변에 살던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바위에 실려 일본 땅으로 건너가자 신라에서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는 설화(삼국유사)도 김 교수의 연구를 통해 되살아났다. 신라 때 왕경(경주)에선 개기일식이 총 5건 벌어졌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158년 7월 13일 발생했다. 김 교수는 “신라인들의 천문 경험이 1000년 뒤까지 이어져 설화로 남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1066년 4월 고려의 하늘을 지나가던 핼리혜성 경로도. 김일권 교수가 사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김 교수 제공

1066년 4월 고려의 하늘을 지나가던 핼리혜성 경로도. 김일권 교수가 사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김 교수 제공
역사 속 핼리혜성 기록을 검증한 것도 성과다. 아쉽게도 삼국사기의 혜성 기록은 핼리혜성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 기록에선 “문종 20년(1066년) 4월 달 크기만 한 혜패성이 서북쪽 하늘에 출현했다”는 ‘고려사’ 기록이 처음이다. 김 교수는 ‘송사’ 천문지 등을 종합해 당시 핼리혜성이 지나간 천구상의 경로를 복원하기도 했다.

신라시대에도 오늘날의 요일제와 비슷한 휴일 개념이 존재했다는 것도 밝혀냈다. 비문 등의 날짜를 분석한 결과, 초하루와 보름뿐 아니라 상현과 하현에 해당하는 날짜가 자주 등장한 것. 김 교수는 “한 달에 4번은 쉬었던 신라의 습속이 고려의 공적 공휴일로 제도화됐다”며 “하지만 조선시대 들어 유교 제례 중심의 시간관으로 변하면서 이런 문화가 단절됐다”고 했다.

삼국사기의 시간 기록을 일일이 검증해 외교 연월일을 모두 복원하고 양력으로 환산한 것도 김 교수가 처음이다. 이 분석에 따르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양력으로는 612년 8월 26일 일어났다. 태풍 등으로 인한 살수(청천강)의 유량 증가가 수공(水攻)을 가능케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무명(無名)의 역사는 경험으로 접근해야”

김 교수는 초자연적 주술 세계를 긍정하던 고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선 실증주의 역사학을 넘어선 ‘경험주의 역사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건국시조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게 사실이냐고 따지면 뭐 하겠습니까. 삼한일통의 오줌 꿈을 사고팔았다는 몽험(夢驗)의 기록을 어떻게 실증하겠습니까. 건강한 경험 사학이 기존 실증사학의 빈 부분을 채울 수 있을 겁니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회들이 공동으로 검증해 ‘삼국사기 연대기’를 새로 편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김 교수의 바람이다.

“현행 삼국사기 번역을 더욱 정밀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증하다 보면 기록에 없는 것을 찾아내거나, 바로잡을 수도 있을 겁니다. 역사 관련 정부기관도 참여해서 한 10년 동안 해 보면 어떨까요?”

성남=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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