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랑서 에스페호 개인전
은은한 달빛과 산 그림자에
한국적 서정 담은 회화 전시
"청산리 벽계수야 쉽게 흘러감을 자랑 마라. 한번 푸른 바다에 나가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밝은 달빛)이 만공산하니(滿空山·빈산에 가득하니) 잠시 쉬어간들 어떠리."
조선 중기 기생 황진이가 왕족 '벽계수'를 유혹하기 위해 지은 시조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지나가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으니 잠시 멈춰 삶을 음미하자는 존재론적 성찰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을 우연히 팟캐스트로 듣고 붓을 잡은 서구 작가가 있다.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는 칠레 출신의 30대 젊은 작가 세바스티안 에스페호(36·사진)다. 평소 시간의 유한성과 삶의 덧없음을 정물화로 표현해온 그는 황진이가 일구어낸 문학적 세계에 순식간에 매료됐다. 그러고는 시조 속 구절을 딴 '밝은 달(Bright Moon)'이라는 제목으로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한국 첫 개인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시조에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 바로 유화 '달과 강(The moon and the river)'이다. 40호 남짓한 아담한 크기지만 2024년부터 올해까지 장장 3년에 걸친 덧칠 끝에 완성했다. 은은한 달빛과 단풍 진 산그림자가 아스라이 강가를 물들이고, 그 위로 뱃사공이 한가로이 노를 젓는 풍경이 고즈넉하게 펼쳐진다.
사실 그는 이미 지난해 9월 선화랑이 기획한 '런던 활동 작가 6인전'을 통해 한국 미술계에 눈도장을 찍은 바 있다. 그사이 뉴욕 프리즈에서 완판을 기록했고, 불과 1년 만에 작품 가격이 3배 이상 올랐다. 현재는 2호 남짓한 작은 소품이 1000만원을 넘는다. 여기에 영국 권위의 미술상 최종 후보에 잇달아 이름을 올리며 평단의 신뢰까지 확보한 상태다.
에스페호는 칠레 가톨릭대에서 사실주의 기법을 연마했지만 실제 작품은 모호하고 시적이다. 또한 일상적인 사물인 이끼, 나뭇가지, 정물 등을 화폭 아래에 담고 그 상단에는 작가의 무의식과 내면의 풍경을 여러 겹의 층으로 쌓아 올린다. 2·3호 크기의 소품이 대부분인데, 작품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이동 중에도 계속 작업을 이어간다고 한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밀도가 꽉 찬 그림들이다. 우리 고유의 은은한 달빛 정서가 서구 작가의 캔버스 위에서 서정적으로 피어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전시는 이달 12일까지였으나 30일까지 연장됐다.
[이향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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