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찾은 서울 한남동 VSF갤러리. 한때 외국 유명 작가의 작품들이 즐비하던 이 갤러리 내부에는 잡동사니만 굴러다니고 있었다. 유리창에는 ‘임대 문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본점을 둔 이 갤러리는 2019년 서울에 지점을 냈지만 최근 한국 시장에서 발을 빼고 북미 지역에 집중하기로 했다.
미술계 관계자는 “서울 지점 판매 실적이 예상을 훨씬 밑돈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독일 베를린에 본점을 둔 세계적 화랑 쾨닉의 서울 지점 역시 1월 25일 폐막한 아야코 록카쿠 개인전을 끝으로 전시를 열지 않는다. 미술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 무기한 휴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한국 진출 후 4년 만에 내린 결정이다.
◇미술시장 3년째 내리막길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갤러리의 휴업 및 철수가 잇따르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2022년 말부터 3년째 이어진 글로벌 미술시장의 불황이다. 본사가 흔들리며 지점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2005년 베를린에 개관해 이탈리아 밀라노와 서울로 지점을 확장한 페레스프로젝트가 대표적 사례다. 지난 2월 독일 법원은 페레스프로젝트 독일 본사에 파산을 선고했다. 이 때문에 판매 실적이 좋은 편이던 서울 지점도 폐업이 불가피해졌다. 서울점은 올해 말까지 운영한 뒤 폐업 수순을 밟을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갤러리들도 휘청이고 있다. 올해 설립 20년 차를 맞는 중견 갤러리인 서울 청담동 원앤제이갤러리는 이달 초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이 갤러리는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을 해외에 주도적으로 소개하며 국내 주요 화랑 중 하나로 꼽혀왔다. 박원재 원앤제이갤러리 대표는 “시장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 갤러리 시스템을 재정비하며 쉬어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 갤러리 관계자는 “일부 초대형 갤러리를 제외하면 휴업이나 폐업을 고려 중인 갤러리가 많다”며 “불황이 2년 넘게 이어져 근근이 버텨오던 갤러리도 한계 상황에 다다랐다”고 말했다.
◇미술품 조각투자도 청약 미달
미술 관련 사업도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조각투자가 대표적이다. 올 들어 진행된 조각투자 청약은 모두 흥행에 실패하며 미달 사태를 겪었다. 열매컴퍼니가 들고나온 쿠사마 야요이의 7억4000만원 상당 작품 ‘호박’ 청약률이 50%에 못 미친 게 단적인 예다. 경영 위기를 겪는 미술 관련 스타트업도 부지기수다. 인공지능(AI)과 미술을 접목한 사업을 벌이는 A스타트업은 최근 임금 체불 관련 분쟁을 겪으며 구설에 올랐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내후년에는 프리즈가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아트바젤과 함께 세계 양대 아트페어로 꼽히는 프리즈는 2022년부터 매년 9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프리즈 서울’을 열며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서울로 집중시켰다. 프리즈의 서울 진출 전후로 한국 미술시장이 역사상 최전성기를 구가한 덕분에 국내에 지점을 내는 외국계 갤러리가 잇따랐다. 하지만 프리즈의 당초 계약 기간은 5년으로, 내년 행사 이후 연장하지 않으면 그대로 계약이 만료된다. 미술계 관계자는 “프리즈 서울에 참여하는 글로벌 대형 갤러리가 갈수록 줄고 있다”며 “그만큼 프리즈 서울의 수익성이 기대한 것보다 낮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직은 프리즈 서울의 철수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게 미술계 중론이다. 아시아 시장에 교두보가 필요한 서구권 미술계에 서울보다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독일 마이어리거갤러리, 이탈리아 마시모데카를로갤러리가 미술시장 불황에도 서울 지점을 연 이유다. 한 외국계 화랑 관계자는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이던 홍콩은 ‘중국화’와 미·중 무역 갈등으로 서울보다 더 심각한 불황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