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골과의 조우… 예술과 법이 죽음을 읽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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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 속에 몰입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 전시실. 나는 유리섬유로 정교하게 제작된 해골 무더기 한가운데 서 있었다. 호주 작가 론 뮤익(Ron Mueck, 1958~)의 이 작품은 사람 크기보다 훨씬 큰 해골들을 탑처럼 쌓아 올림으로써, 관람객이 마치 죽음의 무리 속에 둘러싸인 듯한 체험을 하게 만든다. 1997년 <죽은 아버지(Dead Dad)>의 제작 이후 20년 만에 론 뮤익은 다시 죽음을 주제로 한 설치 작품 <매스(Mass)>를 선보였고 올 봄 우리나라에 온 것이다.

론 뮤익, <매스(Mass)>, 2016-2017, 유리섬유에 합성 폴리머 페인트, 가변 크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 사진. © 김현진

론 뮤익, <매스(Mass)>, 2016-2017, 유리섬유에 합성 폴리머 페인트, 가변 크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 사진. © 김현진

거대한 해골 100개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해골은 개별적인 정체성이 아니라 군집이라는 점에서 강렬하다. 그 사이에 서니 죽은 자에 대한 경외로부터 역사적 집단 학살이라는 비극에 대한 추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이 교차한다. 해골은 거부감을 일으키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주의를 끈다. 관람객은 작품 속에 몰입되어 해골과 교감하고 탐색하는 여정에 푹 빠져든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묘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높은 창문까지 쌓여진 해골 무더기는 파리의 지하 납골당 카타꼼(catacombes)을 연상시켰지만 거기에서 느꼈던 공포는 없었다. 뮤익의 해골들은 고요하고, 중립적이며, 심지어는 평화로워 보였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 형태로 남게 되리라는, 너무도 단순한 사실 앞에서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예술은 언제나 죽음을 우리 눈앞으로 당겨 앉히는 힘을 가진다. 그것은 삶의 소음을 멈추고, 존재의 윤곽을 다시 그리게 만든다.

바니타스, 그리고 메멘토 모리

해골을 본다는 행위는 사실 낯설지 않다. 17세기 네덜란드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는 해골, 모래시계, 시든 꽃, 거품, 촛불을 병치시켜 놓고 인생의 덧없음을 경고했다. 죽음은 화려한 장식품 속에 감추어진 진실이었으며, 삶의 쾌락과 무상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도상적 장치였다. 그중에서도 네덜란드-플랑드르 작가 피터르 클라스(Pieter Claesz, c.1597–1660)의 1630년 작 <바니타스 정물화(Vanitas Still Life)>는 이 장르의 미학과 사유를 정점으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인간의 무용한 지식을 뜻하는 낡은 책 위로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싯펜이 놓여 있고, 옆에는 넘어져 곧 깨질 듯한 유리잔과 방금 꺼진 등잔, 그리고 엎어진 회중시계가 정밀한 질감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인생의 유한성과 인간 지식의 허망함을 동시에 경고한다. 특히 해골과 사물 간의 거리감, 정교한 반사광의 조율은 침묵 속에서 관객의 감각을 되살린다. 클라스의 회화는 죽음을 과장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고요하게 응시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단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맞이할 삶의 종결을 “읽는다”.

피터르 클라스, <바니타스 정물화>, 1630년, 캔버스에 유채, 39.5 x 56cm,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헤이그

피터르 클라스, <바니타스 정물화>, 1630년, 캔버스에 유채, 39.5 x 56cm,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헤이그

한편, 영국 작가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1965–)가 만든 다이아몬드 해골은 현대 예술이 죽음을 어떻게 상업화하고, 아이콘화하는지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해골은 이제 박제된 '예술 소비재'가 되었고, 죽음조차 빛나는 대상으로 탈바꿈된다. 삶이 과잉된 사회에선 죽음마저 과잉되어야만 비로소 시선이 머문다. “신의 사랑을 위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18세기 인간의 해골을 백금으로 주조하여 8,601개의 흠집 없는 다이아몬드로 장식했으며, 이마 한 가운데에는 배 모양의 분홍색 다이아몬드인 '스컬 스타 다이아몬드'가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해골에 가지런히 박힌 이빨들은 실제 인간의 것이며, 허스트가 런던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인간의 필멸성을 상기시킨다.

데미언 허스트, <신의 사랑을 위해>, 2007년, 플래티넘 다이아몬드, 인간 이빨, 화이트큐브 갤러리, 런던

데미언 허스트, <신의 사랑을 위해>, 2007년, 플래티넘 다이아몬드, 인간 이빨, 화이트큐브 갤러리, 런던

삶과 죽음 그 경계에서

'죽음' 하면 떠오르는 회화 작품이 있다.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죽음과 삶>. 그는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어둡고 적막한 경계를 그렸다. 어느누구도 대신 건널 수 없는 고독한 공간. 그림 왼쪽의 검은 십자가 패턴의 가운을 입고 몽둥이를 들고 선 저승사자이다. 사람들을 노려보며 누구를 데리고 갈까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하다.

반면, 그림 오른쪽의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거나 엉켜 있다. 무리 왼쪽의 젊은 여성만이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뿐, 다른 이들은 눈을 감고 죽음을 외면하는 듯 보인다. 꽃과 금빛으로 수 놓인 육체들은 삶의 기쁨과 풍요를 상징하지만, 그 곁엔 대조적으로 회색빛의 죽음이 기다린다는 현실을 클림트는 이야기하고 싶었으리라. 삶과 죽음은 경계를 두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얇은 장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음을 인식할 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저승사자 앞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도, 근육질의 남성도, 증년의 여성도 평등한 것이다. 수년 전 비엔나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마주하고 서서 한참 동안 먹먹해진 채 나 자신의 내면을 응시했던 때가 생각난다.

구스타브 클림트, 〈죽음과 삶〉, 1915년, 캔버스에 유채, 180.5 × 200.5cm, 레오폴드 미술관, 비엔나

구스타브 클림트, 〈죽음과 삶〉, 1915년, 캔버스에 유채, 180.5 × 200.5cm, 레오폴드 미술관, 비엔나

죽음을 규정한다는 것

예술이 죽음을 형상화한다면, 법은 죽음을 규정한다. 최근 “착한 법 만드는 사람들”이 「연명의료결정법」이 소극적 안락사만을 허용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적극적 안락사를 포함한 존엄사에 대한 입법을 촉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존엄사란 대체로 깨어날 가망이 없는 의식상실 상태의 환자로 하여금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생명유지장치를 중지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리하여 현행법상 금지되는 촉탁살인죄, 자살방조죄 등과의 경계를 설정하고, 극심한 고통을 없애기 위한 안락사를 엄격한 요건 하에서 인정하기 위한 많은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한편, 안락사가 가능한 나라 중 하나인 스위스에서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를 동행한 딸의 담담한 기록이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 책을 읽으며 나는 다시 해골 사이에 서 있던 순간을 떠올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물리적인 순간이 아니라, 감정과 판단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고, 법은 그 경계에 선 사람의 손을 잡아줄지, 아니면 외면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몇몇 국가들, 가령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 오리건 주 등은 이미 일정한 요건 하에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으며, 우리 사회 역시 이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는 단지 의학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법이 어떤 삶의 형태를 ‘존엄’이라 부를 것인가에 대한 선언이 아닌지. 존엄한 삶은 존엄한 죽음을 전제하기에.

사진출처. pixabay

사진출처. pixabay

법과 예술, 죽음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다

예술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응시해왔다. 장식과 상징, 정물과 신화를 통해 죽음을 이야기해 왔고, 때로는 침묵의 형상으로 죽음을 남겼다. 반면 법은 이를 다르게 다루어, 오랫동안 죽음을 분류하고, 기록하고, 통제해 왔다. 자기결정권, 생명권 등 여러 법적 개념들이 겹쳐 있는 이 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느 하나의 정답을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예술이 보여준 것처럼, 죽음은 하나의 형태로 고정될 수 없다. 다만 그 곁에 머물고,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죽음을 단지 끝으로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고요한 동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해골은 말이 없다. 그러나 예술과 법은 그 침묵 속에서, 각자의 언어로 인간을 해석한다.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를 드러내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삶의 해석이며, 존재의 마지막 문장이다. 누구도 그 문장을 대신 써줄 수 없고, 누구의 문장도 쉽게 간과될 수 없다. 우리는 그 문장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피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떠날 것인가.

김현진 법학자•인하대 로스쿨 교수

[론 뮤익|국립현대미술관 서울|2025. 4. 11. ~ 2025.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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