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8월 13일 이성계가 왕좌에 앉은 날[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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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문영 역사작가 조선은 언제 건국의 시동을 걸었을까? 운명의 수레바퀴는 위화도 회군 때 돌아가기 시작했다. 명(明)의 철령위(鐵嶺衛) 설치에 반발한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 정벌에 나섰지만, 이에 반대하던 이성계가 결국 압록강에서 군사를 돌렸다. 이 사건이 바로 위화도 회군이다.이성계 일파는 권력을 장악한 뒤 왕가의 정통성에 흠집을 냈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요승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우왕의 아들 창왕(昌王) 역시 왕가의 정통성을 지니지 못한 인물로 취급됐다. 우왕과 창왕은 모두 공민왕의 제4비 정비 안씨에 의해 폐위됐다. 정비 안씨는 훗날 공양왕의 폐위도 명하게 된다.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왕씨 혈통을 찾아 옹립한 만큼 쉽게 내쫓을 수는 없었다.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이 혼미하고 흉폭하다고 주장하며 나라 사람들이 그를 몰아내고 이성계를 추대한 것이라고 말을 꾸몄다.이성계는 북쪽에서 나하추와 홍건적을 물리치고 남쪽에서 왜구를 쓸어버린 구국의 명장이었다. 여기에 이성계 일파는 그가 천명(天命)을 받은 존재임을 보여주는 데 힘을 쏟았다. 천명은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였고, 실제 중요한 것은 새 나라의 비전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전제 개혁, 오늘날로 치면 역시 부동산 문제였다.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 이후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다.토지제도가 망가지면서 고려의 재정은 부실해졌고, 양민마저 노비로 전락하는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성계 일파는 전제 개혁과 함께 노비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찰 세력도 문제였다. 고려의 사찰은 왕실의 비호 아래 불법적으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조선 왕조는 유교 국가를 표방하며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제한하는 등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축소해 나갔다.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가 왕좌를 차지하기까지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우왕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이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고, 위기를 벗어난 이성계 일파는 반대 세력을 살벌하게 숙청했다. 명나라에는 이성계가 침공할 것이라는 무고가 올라가기도 했다. 명을 끌어들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명이 도와주지 않아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명재상으로 명망이 높았던 정몽주가 고려의 존속을 위해 공양왕 편에 서면서 이성계 일파에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암살해 위기를 돌파했다. 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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