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영화거장이 남긴 최후의 시나리오

1 day ago 1

잉마르 베리만의 젊은 시절 모습. 위키피디아

잉마르 베리만의 젊은 시절 모습. 위키피디아

‘시작은 다 허세에서 비롯된 듯싶다.’ 스웨덴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1918~2007)의 자서전 <환등기>를 본 첫인상은 이렇다. 영화학자이자 잉마르베리만재단의 CEO로 베리만의 영화적 성취를 알리고 있는 얀 홀름베리가 직접 자서전의 해설을 맡아 책 말미에 남긴 말이기도 하다. 20세기 최고의 영화예술가 중 한 명인 베리만이 적어 내려간 삶의 기록을 두고 다소 박하다 싶을 수 있지만, 적어도 틀린 평가는 아닐 것이다. 원래 예술가란 감히 삶을 통찰하고 인간을 말하려는 사람들이니까. 소설가들이 스스로 신이 돼 인물의 운명을 좌우하고, 영화감독들이 현실보다 더 정교한 픽션을 짜는 순간에도 밑바탕엔 어쩔 수 없는 자의식의 과잉이 깔려 있기 마련이다.

스웨덴의 작은 섬 포뢰에서 쓰인 책은 베리만의 ‘허세로 시작한 자아 해명서’라 할만하다. 여느 자서전처럼 어린 시절부터 생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선입선출식으로 기억을 나열한 글이 아니다. 한 거장이 필모그래피를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써 내려간 시나리오에 본질적으로 더 가깝다. 단지 기억을 기술한 게 아니라, 삶을 하나의 서사로 연출했다는 뜻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피가 흐르고 잉마르는 핏기 없이 웃음 짓는다. 현실. 그리고 시네마토그래프가 왔다’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는 글을 읽으면서다. 보르헤스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같은 작가들의 ‘마술적 사실주의’식 소설을 연상케 하는 자서전이 또 있을까. 애당초 자서전 이름부터가 상징적이다. 전근대 마술사들이 애용했던 환등기는 강렬한 빛을 쏴 이미지를 비춰내는 원시적 슬라이드 영사기로, 인류를 영화라는 환상의 세계로 안내한 첫 매개체다.

환등기는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의 기원이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어린 시절 베리만이 난생처음 영화관에서 가서 본 “결코 사라지지 않을 열병에 걸리게 한” 시네마토그래프와 함께 자신의 분노와 희망, 꿈을 토해낼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대표작 ‘화니와 알렉산더’(1982)에서 성탄절 파티를 마친 후 어린 알렉산더가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을 발하는 환등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장면이 떠오른다. 베리만의 영화 상당수에 자전적 요소(‘결혼의 풍경’)가 깔려 있고, 현실과 환상이 쉼 없이 교차하는 연출(‘산딸기’)이 반복되는 것을 고려하면 <환등기>라 이름 붙인 책이 자서전의 탈을 쓴 시나리오라는 점은 보다 분명해진다.

잉마르 베리만 자서전 <환등기>

잉마르 베리만 자서전 <환등기>

온통 이해하기 어려운 글로 가득 찬 것은 아니다. 매질을 일삼던 엄한 아버지와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던 불안정한 유년기, 예술적 야심과 성취를 이룬 과정, 나치 독일에 매료돼 “하일 히틀러”를 외쳤던 어리석었던 유학시절, 화려했던 여성편력과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첫 경험의 기억, 탈세 누명을 뒤집어쓴 채 잠자코 지내야만 했던 울분의 나날들이 현장감 넘치게 쓰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가 기꺼이 서문을 쓰고, 프랑스 매체 르 몽드가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한 시대의 예술적 의식을 대변하는 심오한 고백’이라고 호평한 건 이 최후의 시나리오의 작품성이 뛰어나단 방증이다.

극장의 위기라지만 위대한 감독들이 남긴 예술영화는 오히려 각광받는다. 장뤼크 고다르, 마틴 스코세이지, 데이비드 린치, 라스 폰 트리에보다 앞서 영화라는 꿈을 좇았던 옛 거장을 활자로 만나보는 건 어떨까. 허세로 출발했지만 과장된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구구절절 촬영물을 편집하듯 삶을 잘라내고 이어 붙여 완성한 시나리오의 연출은 완벽하다.

유승목 기자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