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900년경 메소포타미아. 오늘날 이라크 지역에 있던 두 도시국가는 국경을 정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양측은 결국 제3자에게 판단을 맡겼고, 그 결과는 돌기둥에 새겨졌다. 오늘날 ‘독수리 비석(Stele of the Vultures)’으로 알려진 이 유물은 두 도시국가의 경계를 표시하는 표지석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전사자들의 시신 위를 독수리들이 날아다니는 장면으로 유명한 이 비석은 전쟁의 참혹함과 함께, 인류가 오래전부터 국제중재로 분쟁을 해결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더 흥미로운 기록도 있다. 기원전 약 2000년경, 오늘날 이라크 키르쿠크 인근의 두 토지 소유자 사이에서 물 사용권을 둘러싼 중재가 있었다. 이를 오늘날식 사건명으로 붙인다면 ‘Kili v. Tubenaya’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사건에서 Kili는 물 사용권 침해를 이유로 은 7세켈과 황소 한 마리를 받았다고 한다. 오늘날 기업들이 손해배상 책임을 놓고 다투듯, 4000년 전 사람들 역시 자원과 재산을 둘러싸고 중재를 한 셈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조약에 따라 영토와 신전 관리권 분쟁을 중재로 해결했다. 이후 중세 유럽의 상인들도 각국 법원보다 자신들이 선택한 전문가를 더 신뢰했다. 국경을 넘는 거래가 늘어날수록 각 지역의 법과 관습은 서로 달랐지만, 상인들은 거래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분쟁을 맡기기를 원했다. 1622년 출간된 ‘렉스 메르카토리아(Lex Mercatoria)’ 역시 중세 유럽 상인들 사이의 중요한 분쟁해결 수단으로 중재를 소개하고 있다. 스위스, 프랑스, 영국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동 여러 곳의 오래된 사료에서도 모두 중재기록이 확인된다.
수천 년 동안 서로 다른 문명과 시대가 법원이 아닌 독립된 제3자의 판단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길, 중재를 반복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법원은 의심했지만 시장은 선택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국가기관이 제도적으로 중재를 지원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례로 19세기 미국과 영국의 판사들, 20세기 초반 독일의 판사들은 중재처럼 민간인이 선택한 제3자에게 분쟁 해결을 맡기는 것은 불완전한 제도라고 비판하였고 그 집행을 거부한 바 있다.
그럼에도 중재가 역사에서 살아남은 것은 시장이 원했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는 거래가 늘어날수록 상인들은 상대방 국가 법원에서 재판받는 것을 꺼렸다. 언어와 절차가 다르고, 때로는 중립성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상인들이 원한 것은 특정 국가의 판사가 아니라 양측이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였다.
중립성, 전문성, 신속성. 오늘날 국제중재의 핵심 가치로 꼽히는 요소들은 사실 수천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수요는 결국 제도화로 이어졌다. 1923년 국제상업회의소(ICC)는 ICC 국제중재법원(ICC International Court of Arbitration)을 설립했다. 올해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ICC는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중재기관 가운데 하나다.
나아가, 앞서 역사적으로 문제되던 각국 법원의 불신 문제도 1958년 뉴욕협약(New York Convention)을 통해 해소되었다. 현재 170여 개국이 가입한 뉴욕협약은 중재판정의 승인과 집행을 국제적으로 보장하는 기반이 되었고, 국제중재는 비로소 중립성·전문성·신속성에 더해 집행력까지 갖춘 글로벌 분쟁해결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시장이 원했던 제도가 마침내 법적 뒷받침까지 얻게 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더 빠르고 더 효율적으로
뉴욕협약 이후 국제중재는 빠르게 성장했다. 아시아에도 홍콩국제중재센터(HKIAC),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대한상사중재원(KCAB) 등 다양한 중재기관들이 설립되었고, 국제중재는 글로벌 거래의 핵심 분쟁해결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기관이 최근 비슷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개정된 규칙들을 살펴보면 신속한 분쟁 해결, 적극적인 사건 관리, 다수당사자·다중계약 분쟁에 대한 효율적 대응, 전자 제출 등 디지털 사용 확대라는 공통된 흐름이 나타난다. 서로 경쟁하는 기관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용자들이 원하는 것이 같기 때문이다. 더 빠르고, 더 효율적이며, 더 예측 가능한 분쟁 해결. 결국 5000년 전 상인들이 원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제중재의 중심축은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가
최근 국제중재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아시아의 부상이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ICC 사건의 약 62%는 아시아 당사자들 사이의 분쟁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사용자가 달라지면서 제도 역시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아시아권 분쟁이나 대륙법계 국가들 사이의 분쟁에서도 만연히 영미권 중재인이 선임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건의 법적·상업적 배경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대륙법계 및 아시아 지역 중재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필자는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두 명의 ICC 국제중재법원 상임위원(Court Member) 중 한 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ICC 국제중재법원에서 확인되는 변화도 같은 방향이다. ICC는 최근 대륙법계 및 아시아 지역 중재인의 참여를 확대하고 있으며, 사건 운영 과정에서도 아시아 사용자들의 요구를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노력하고 있다.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들이 제3자의 판단에 분쟁 해결을 맡겼을 때만 해도, 그 제도가 오늘날 170여 개국에서 집행되는 글로벌 인프라로 발전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국제중재의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아직 진행 중이다. 국제중재의 중심축이 점차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앞으로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앤김 국제분쟁리포트]에서는 국제상사중재, 해외소송 등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분쟁과 최신 동향을 살펴보고, 기업이 알아야 할 실무적 시사점을 소개합니다.
신연수 변호사는 법무법인 피터앤김 파트너로 국제상사중재 및 다양한 국제분쟁 해결 분야를 전문으로 맡고 있습니다. 현재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 한국 대표 상임위원(Court Member)이자, 다양한 국제중재기관의 중재인으로도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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