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내로 '67조' 정리 못 하면…" 기업들 비상 걸린 까닭

4 weeks ago 21

사진=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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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대기업의 자금 조달 전선에 비상이 걸렸다. 금리가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국고채 시장에 한발 빨리 반영되며 회사채 조달 금리가 치솟았다. 시설 투자 등 기업의 미래를 위해 써야 할 자금이 금융 비용으로 새어 나가는 형국이다. 모자회사 중복 상장 금지로 계열사 상장이 힘들어진 상황에서 회사채 시장까지 경색되자 ‘플랜B’를 찾는 기업이 늘었다. 계열사 지분을 내다 팔거나 모회사에 대출을 요청하는 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

5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회사채 발행 규모는 36조4623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5조4184억원)에 비해 약 20% 줄어들었다. 1분기 기준 회사채 시장이 역성장한 것은 레고랜드 사태가 발생한 2022년 이후 4년 만이다. 회사채 발행 기업은 작년 98곳에서 올해 74곳으로 감소했다.

에쓰오일은 이달 초 5000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을 계획했으나 극심한 금리 변동성으로 일정을 연기했다. 상반기 내 만기가 돌아오는 1600억원어치 채권을 차환해야 하는 에쓰오일은 회사채 발행 대신 모회사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에서 대출받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미국·이란 간 긴장이 고조된 직후 금리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예정된 2000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 계획을 잠정 보류하기로 했다. LS일렉트릭도 지난달 31일로 예정한 3000억원 규모 회사채 조달 계획을 연기했다. 회사채 금리의 기준이 되는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석 달 사이 연 3.0%에서 연 3.5% 안팎으로 0.5%포인트가량 상승했다. 시장 변동성도 커졌다. 미국·이란 전쟁으로 하루 금리가 0.2%포인트씩 널뛰어 회사채 발행 시점을 잡는 게 쉽지 않다.

기업들은 고육지책으로 유상증자에 기대고 있다. 한화솔루션은 지난달 2조400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결정했다. SKC는 지난 2월 1조원 규모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이들 기업이 소액주주 반발을 무릅쓰고 유상증자에 나선 것은 기존 채무를 상환해 금융 비용을 절감하려는 목적이 크다.

"올 회사채 발행 30% 줄 것"…석유화학·2차전지 투자 늦춘다
"비싼 이자 무서워"…1~3월 '회사채 성수기' 실종

전통적으로 1~3월은 회사채 시장의 ‘성수기’로 통한다. 기업들이 3월 주주총회 전 한 해 자금 조달 목표를 세우고 물량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통상 연간 발행량의 절반이 이 시기에 몰린다. 기관투자가의 투자 집행이 재개되는 ‘연초 효과’ 덕에 금리도 하향 안정세를 보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올해는 이 공식이 통하지 않는 모양새다. 시장 상황이 급반전되고 금리가 급등해 회사채를 발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6개월 내로 '67조' 정리 못 하면…" 기업들 비상 걸린 까닭

◇ 1분기 발행 물량 급감

이런 분위기가 여실히 드러나는 곳은 회사채를 발행하기 전 시장 움직임을 가늠하는 수요예측 시장이다. 이달 수요예측에 나섰거나 일정을 확정한 기업은 한화호텔앤드리조트 호텔신라 한일시멘트 SK네트웍스 등 11곳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 56개 기업이 수요예측을 한 것과 비교하면 80%가량 감소했다. 증권업계에서는 올해 전체 회사채 발행 규모가 30% 이상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올해 1분기에도 회사채 발행 규모가 전년 같은 기간보다 20%가량 감소했다.

기업들은 기존 채권 만기가 돌아오면 새로운 채권을 찍어 빚을 갚는 게 보통이다. 증권업계는 회사채 시장의 차환 체계가 흔들릴 것으로 보고 있다. AA급 우량 회사채 스프레드(국고채-회사채 금리 차이)가 0.6%포인트(60bp)로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이 벌어지는 등 자금 조달 여건이 악화하고 있어서다. 스프레드가 확대됐다는 것은 국고채 대비 회사채 매력도가 떨어져 기업이 더 큰 비용을 치러야 돈을 빌릴 수 있다는 뜻이다. 1조원을 차환하면서 기업이 추가로 물어야 하는 이자는 연 60억원 안팎이다.

올해 정리해야 하는 회사채는 80조원어치가 넘는데, 대부분 6개월 이내에 만기가 도래한다. 2분기 33조8925억원, 3분기 33조3045억원, 4분기 14조5899억원어치 등이다. 그룹사별로는 SK그룹의 차환 물량이 3조9165억원어치로 가장 많다. 롯데그룹(1조5230억원)과 신세계그룹(1조3000억원)이 그 뒤를 이었다. 포스코, LG 한화그룹도 차환 물량이 ‘조단위’에 이른다.

◇ 업황 부진 기업은 고전

제일 골머리를 앓는 곳은 석유화학 업체다.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와중에 미국·이란 전쟁이라는 변수가 더해졌다. 석유화학 업체들은 원유 부산물인 나프타를 들여와 플라스틱, 비닐 등의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판매해 얻은 수익으로 원료를 조달해왔다. 최근엔 전쟁으로 원료 수급 자체가 원활하지 않다.

시장에서는 위기에 빠진 석유화학 기업들의 회사채 차환이 녹록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천NCC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 신용등급은 현재 A-(부정적)다. 한 단계만 더 하락하면 사모사채를 즉시 갚아야 하는 조기 상환 트리거가 발동할 수 있다. HD현대오일뱅크의 지난 2월 차환은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받고 있다. 1500억원어치 회사채를 발행하는 수요예측에 7850억원의 주문이 몰렸는데도 3년 만기와 5년 만기 모두 지난해보다 금리를 0.05%포인트 올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수익성 하락에 고심하는 2차전지 기업들은 회사채 시장에서 발을 빼는 모습이다. 전기차 수요 둔화로 실적 변동성이 커지자 설비 투자 규모를 줄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회사채 발행 규모를 지난해 1조6000억원에서 8000억원으로 축소했다.

회사채 시장 시금석인 국고채 금리 향방은 안갯속이다. 원유 가격 상승이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면서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은 완전히 꺾였다. 오히려 시장에서는 한은이 물가 억제를 위해 7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일부 기업은 은행 대출로 자금 조달 경로를 바꾸고 있다. 무보증 회사채(AA-) 3년 만기(금리 4.1%)보다 은행 대출이 유리한 ‘금리 역전’ 현상을 고려한 행보다. 현재 은행 대출금리는 연 4% 선이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1~2주 사이 금리 변동성이 워낙 커 기업에 발행 적기를 추천하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배정철/최석철 기자 bj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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