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 우디네 지하에 펼쳐진 시네필들의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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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네극동영화제는 두 개의 극장을 메인 상영관으로 쓰고 있다. 개·폐막식과 경쟁 작품들 같은 큰 행사나 이벤트가 겸해지는 영화들은 떼아뜨로 누오보(Teatro Nuovo), 그 외 대부분의 작품은 비져나리오 극장(The Cinema Visionario)에서 상영이 된다. 누오보가 오페라 하우스의 내부를 가진 대극장/공연장이라면 비져나리오는 로컬 예술극장의 전형을 보여주는 아트하우스 극장이다. 사실 우디네를 방문할 때면 비져나리오 극장으로 향할 때가 가장 설렌다. 개막식 이후에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는 일정을 시작하는 곳이 이 극장이기 때문이다.

비져나리오는 2004년에 개관했다. 놀랍게도 이 극장은 우디네극동영화제를 운영하는 팀이 만든 극장이다. 당시에 극장이 부족해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결국 아무것도 없던 공터를 사서 극장을 짓게 된 것이다. 영화제가 1998년에 시작되었으니 6년간을 준비해서 극장을 지은 셈이다. 따라서 영화제 기간 극장은 영화제의 상영작 위주로 운영이 되는데 로컬 관객들을 위해서 약간의 개봉작도 함께 상영된다.

왕가위 감독 <화양연화>가 상영되고 있는 비져나리오 내부. / 사진출처. Le Sale - Visionario

왕가위 감독 <화양연화>가 상영되고 있는 비져나리오 내부. / 사진출처. Le Sale - Visionario

겉으로 보기에 비져니라오는 (유럽의 전통적인 시네마테크나 아트하우스 극장과는 달리) 모던하고 다소 투박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가면 마치 동네 문화센터에 들어간 것처럼 친근한 세팅이 놀라움의 반전을 준다. 건물 왼편에는 박스 오피스와 카페테리아, 그리고 영화 관련 서적을 읽고 구매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지하에 위치한 모든 상영관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다. 다시 말해 비져나리오는 넓은 공간의 높지 않은 건물이며 모든 상영관은 지하 1~2층에 있다. 방음 시설이 가장 중요한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상영관을 모두 지하에 지었다는 것은 꽤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비져나리오의 상영관은 아스트라(173석), 에덴(100석, 돌비 에트모스가 설치된 관이다), 페로비아리오(75석), 미네르바(52석), 살레타(27석)를 포함한 5개 관을 가지고 있다. 방문했던 날이 영화제 기간이었음에도 일반 개봉작을 보러 찾아온 로컬 관객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늘 그래 오던 것처럼 상영작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극장에 도착해서 영화 잡지를 보거나 간단히 커피나 칵테일 한 잔을 마시고 상영관에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여러모로 매력이 넘치는 아트하우스 극장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극장에서 가장 사랑하는 요소는 바로 ‘비스트로 프리마필라(Bistro Primafila)’리는 이름을 가진 카페테리아다. 누구든 이용할 수 있는 넓은 테이블 공간도 좋지만, 그 너머에 위치한 작은 카페테리아는 놀랍게도 꽤 다양한 종류의 커피와 칵테일 그리고 음식 메뉴가 있다. 커피의 최강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라는 특성을 고려해도 이 극장의 커피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 얼음을 갈아서 넣어주는 ‘샤케라또’는 전문 카페에서 마실 수 있는 그것과 비교해서도 만족스러운 퀄리티를 가진 커피였다. 무엇보다 한국의 아트하우스 극장에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막강한 바 메뉴! 이것만큼은 비스트로 프리마필라의 백미다. 물론 다양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아트하우스 시네마가 유럽에는 흔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 작은 도시, 우디네의 극장에서 무려 8가지가 넘는 아페리티보(aperitivo: 가볍게 마시는 식전주)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사막의 생수만큼이나 반갑고 귀한 것이다.

비져나리오 극장에 위치한 카페테리아 '비스트로 프리마필라(Bistro Primafila)'. 8가지가 넘는 식전주를 마실 수 있다. / 사진. ⓒ김효정

비져나리오 극장에 위치한 카페테리아 '비스트로 프리마필라(Bistro Primafila)'. 8가지가 넘는 식전주를 마실 수 있다. / 사진. ⓒ김효정

비져나리오 극장에서 관람했던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바로 장선우 감독 회고전으로 상영된 <거짓말>(2000) 무삭제 버전이었다. 고등학생과 중년 남자가 벌이는 S&M 섹스 행각을 그린 이 영화는 아마도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큰 논란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는 무려 2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에 보아도 여전히, 혹은 삭제되었던 부분의 복원으로 더더욱 난감하고 충격적이었다. 함께 영화를 보던 이해영 감독(당시 <유령>으로 영화제에 참가했던)이 아니었다면 그 엄청난 충격을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올해 이 극장에서 만난 한국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와 김동호 위원장의 자취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청년, 동호>였다. 비져나리오 극장 취재를 위해 방문한 날 상영시간이 맞아 관람한 경우다. 영화 속 김동호 前 위원장 역시 현재 한국의 예술극장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라고 해 묘한 기시감을 느끼기도 했다.

장선우 감독 <거짓말> 포스터. 비져나리오 극장에서 '장선우 감독 회고전'으로 상영했다.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장선우 감독 <거짓말> 포스터. 비져나리오 극장에서 '장선우 감독 회고전'으로 상영했다.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궁극적으로 비져나리오는 팬더믹 이후에도 이전의 관객을 회복해서 큰 어려움 없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극장가를 생각하면 정말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생각해보면 극장이 이토록 생명력을 이어 나가는 것은 결국 관객이 찾아와주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관찰한 우디네 관객들은 정말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영화가 시작하기도 한참 전에 와서 커피를 마시고 영화 서적을 읽는다든지, 영화가 끝나도 극장을 나가지 않고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한참 동안 본 영화에 대해서 갑론을박을 벌인다든지. 사실 정말로 부러웠던 것은 그러한 관객 문화였던 것 같다. 물론 비져나리오라는 아름답고 친근한 아트하우스 극장이 존재해서 가능한 일이다.

커뮤니티 안에서 극장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극장은 영화가 모이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과 대화가 모이는 곳이다. 이러한 재미난 사랑방이 인류만큼이나 긴 시간 존재해야 하는 것은 설명의 필요가 없는 일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 극장 설립 및 운영에 대한 정보는 우디네극동영화제의 위원장 사브리나 바라체티와의 인터뷰를 통해 수집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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