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미국·일본과의 협상 타결 소식에 한국을 비롯한 다른 협상 국가들은 다소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저녁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을 통해 일본에 대한 상호관세율을 15%로 내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동안 철옹성처럼 지킬 것으로 예상됐던 자동차 관세율도 12.5%로 절반으로 깎았습니다. 기존 자동차관세율 2.5%와 합해서 일본산 자동차가 15% 관세율에 미국에 수출된다는 뜻입니다.
미국은 일본이 이런 관세율 인하를 '돈을 주고 샀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국 소비시장에 접근하는 대가에 가격표를 붙이고 있는 셈입니다. 일본이 지불한 가격은 시장 개방과 함께 5500억달러에 달하는 투자 약속입니다.
5500억달러면 우리 돈으로 760조원에 달하는 큰 돈인데요. 일본은 작년에 미국을 상대로 685억달러 무역 흑자를 냈는데, 그 여덟 배에 달하는 수준입니다. 투자 기금의 형태로 조성해서 미국이 원하는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그 수익의 90%는 미국에 돌아가는 형태입니다.
이 투자는 원래 4000억달러 수준이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어제 협상장에서 1000억달러를 그 위에 추가로 더했고, 최종 발표할 때 500억달러를 더 적어서 5500억달러로 공표한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베트남을 상대로도 합의한 것과 다른 내용을 먼저 공표해서 굳히기를 하는 전략을 자주 사용해 왔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일본이 미국산 군수품을 수십억달러어치 샀다는 내용을 트루스소셜에 추가로 올렸습니다. 아마 어제 그 말 하는 것을 빠뜨렸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또 일본과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진행하기 위한 조인트벤처, 합작회사를 설립하겠다고도 공개했는데요. 다만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일본의 자원개발 담당 정부 관계자는 이 소식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 중이라고만 밝혔습니다.
현재 관건은 5500억달러 투자 안에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가입니다. 여기 시간으로 오늘 오전에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블룸버그에 출연해서 이게 자신이 낸 아이디어였다고 좀 자랑까지 섞어 가면서 자세히 설명했는데요, 일본이 미국에 직접 투자를 하는 게 아닙니다. 일본은 돈만 대는 일종의 전주가 되는 것이고 그 돈을 어디에 대는지는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이 결정하는 겁니다.
돈을 대는 것은 직접 현금을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일본 금융기관들이 출자, 대출, 보증 등의 방식으로 미국의 프로젝트에 대해 파이낸싱을 하는 것입니다. 일본 도요타가 미국에 투자한다 이런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은 알아서 하고, 미국이 하고 싶은 것, 반도체산업이나 조선업을 하기 위한 돈을 일본이 대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수익의 90%가 미국에 돌아간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한데, 미국 정부가 돈을 갖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미국 내 프로젝트에 재투자된다 정도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러트닉 장관은 그러면서 ‘일본이 미국에 막대한 투자를 제공함으로써 관세율을 15%로 낮출 권리를 샀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럽과 한국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 하지만,
지금은 트럼프 대통령이 압박을 가한 상태”라고 덧붙였습니다.
조금 전에 백악관에서 열린 브리핑에도 참석했는데요. 이 자리에서 캐럴라인 레빗 대변인은 해당 자금이 에너지, 반도체, 핵심 광물, 제약, 선박건조 등 핵심 산업에 투자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중에 에너지는 LNG를 포함합니다. 다음은 백악관 팩트시트에서 공개된 투자기금의 사용처입니다.
- 에너지 인프라와 생산(LNG), 첨단 연료, 전력망 현대화 포함)
- 반도체 제조 및 연구(설계부터 제조까지 미국 역량 복원)
- 핵심 광물 채굴·가공·정제(필수 원자재 접근성 확보)
- 의약품 및 의료 생산(외국산 의약품과 의료 공급품 의존 종식)
- 상업·방위 조선(새 조선소 건설 및 기존 시설 현대화)
구속력 있는 협의냐가 중요한데요. 실제로 일본이 이 정도 금액을 당장 마련해서 미국에 주는 것은 아니긴 합니다. 또 구체적인 프로젝트에 따라서 자금제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정도까지 투자할 수 있다는 정도의 업무협약(MOU) 같은 느낌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트럼프 정부가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그대로 둘 것으로 낙관하긴 어렵습니다. 적어도 트럼프 정부 임기 초반에 어느 정도는 실행이 될 것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 우세합니다.
일본과의 협상 타결 내용은 사실상 한국에도 협상 가이드라인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앞서 이미 미국이 한국에도 4000억달러 규모 투자기금 조성을 요구했다고 알려진 바가 있습니다만, 공식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는 논의도 분분합니다. 일본이 예상보다 빠르게 합의를 만들어내면서 우리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과 그래도 충분히 시간을 갖고 대응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일본과는 또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상호관세도 중요하지만 품목별 관세로 인 한 타격이 더 큰 상황이고, 일본이 품목관세를 일부 낮췄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우리도 같이 낮추지 못하면 상대적인 피해를 보는 부분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어떤 카드를 낼 수 있느냐를 살펴봐야 하는데, 이미 관세율 0%인 상황에서 남은 것은 여러 비관세장벽을 낮추는 정도입니다. 러트닉 장관은 유럽연합에 대해서 미국산자동차에 대해 규제 없이 수출할 수 있게 시장을 열어야 한다고 언급했는데요, 우리도 비슷한 종류의 규제 완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23일 오전에 트루스소셜에 여러 개의 글을 잇달아 올렸습니다. 요지는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나라에 관세율을 낮추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관세는 시장 개방을 위한 위대한 힘이고, 그것 없이는 각국이 개방하도록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러면서 일본의 예를 들어서 일본이 농업과 쌀시장 개방을 하는문제에 대해지금까지 항상 완전히 안돼 안돼 라고만 했는데 관세로 그걸 꺾었다고 적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이라는 소비시장의 힘을 활용해서 시장을 열고 추가비용을 전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이 맞아 들어가는 셈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어제 워싱턴 특파원단이 트럼프 1기 정부에서 USTR의 법무실장을 지낸 스티븐 본 변호사와 공동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이 분은 상당히 직설적으로 “미국인들이 계속해서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를 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게 인식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이미 자유무역을 시도해 봤는데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제는 자유무역을 할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또 미일 협상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줄 것 다 내줘도 15%가 한계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10% 수준인 다른 많은 국가에 비해서 한 발짝 뒤에서 달려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주요 무역흑자국과의 균형을 추구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접근을 취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당장 내일 구윤철 기재부총리와 여러 협상단 관계자들이 입국하는데요. 우리 정부와 기업이 한치 앞을 예상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어깨가 무거울 것 같습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