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를 만나 당분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싸우도록 두자는 뜻을 전했다. 이 같은 발언을 두고 취임 직후 종전외교에 힘써온 트럼프 대통령이 생각보다 험난한 협상 과정에 좌절했고, 이미 지쳤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에 따르면 메르츠 총리는 이날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금박 액자를 선물했다. 액자에는 독일 태생인 트럼프 대통령의 할아버지 프레더릭 트럼프의 출생증명서 사본이 담겼다. 트럼프 대통령의 조부는 독일에서 태어나 1885년 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메르츠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시작한 1944년 6월 6일을 언급하며 “독일이 나치 독재에서 해방된 날”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미국이 이 전쟁(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강력한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라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멈추기 위해 러시아에 대한 추가 압박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메르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독일 혈통을 앞세워 미국의 대러 제재를 설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한발 물러났다. 오히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주변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미친 듯이 싸우는 아이들’에 빗대며 “가끔은 아이들이 한동안 싸우도록 한 뒤 그들을 떼어 놓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NYT는 “트럼프는 사실상 미국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할 일은 없다고 말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주독미군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며 “그들이 독일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고 짚었다. 이는 트럼프 1기 집권 당시 주독미군 철수를 압박하던 입장에서 변화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5년 전 “독일이 방위비 분담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있어 돈을 충분히 낼 때까지 병력을 축소하겠다”며 “독일에 주둔하는 미군 수를 2만5000명으로 줄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4만5000명에 달하는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있다”며 “그들은 높은 급여를 받고 독일에서 많은 돈을 쓰기 때문에 독일 경제 발전에는 좋은 일”이라고 했다. 이런 발언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럽 진영 핵심 국가인 독일이 미군 주둔에 대한 대가를 더 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된다. 이날 NATO 32개국은 냉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력 증강 계획에 합의하며 지상 기반 방공체계를 현재보다 다섯 배 규모로 늘린다는 구상을 포함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앞서 독일 정부는 양국 정상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정세, 무역 정책에 관해 논의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이날 기자들의 질문이 일론 머스크와의 갈등 등 미국 정치에 쏠려 메르츠 총리의 발언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번 회담에선 극우정당 독일대안당(AfD)과의 협력을 차단하는 독일 정치권의 ‘방화벽’ 원칙, 자동차 무역 불균형, 독일 정부가 추진하는 디지털세 도입 등 트럼프 대통령과 의견 충돌을 일으킬 사안은 공개 면담 주제로 오르지 않았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메르츠 총리를 “상대하기 매우 좋은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한경제 기자 hanky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