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르고 무기력한 그대, 혹시 시한폭탄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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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은 상상해 봤을 것이다. 아침 단꿈을 방해하는 알람시계를 부숴버리고 싶다는 생각. 여기 그 순간을 작품으로 실현한 이가 있다. 그의 이름은 샘바이펜. 본명은 김세동이다.

서울 종로구 PKM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샘바이펜 작가의 ‘LAZY’ 전시 전경. /PKM

서울 종로구 PKM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샘바이펜 작가의 ‘LAZY’ 전시 전경. /PKM

이번 전시 전반에 키비주얼이 된 작품 'CLOCK'. /강은영

이번 전시 전반에 키비주얼이 된 작품 'CLOCK'. /강은영

서울 종로구 PKM 갤러리에서 샘바이펜 작가의 개인전 ‘LAZY’가 진행 중이다. 전시장 초입에서 아침의 게으름을 형상화한 작품 ‘CLOCK’을 만날 수 있다. 상상이 현실화된 듯 망치가 꽂혀 부서진 벽시계 모양이다. 만화 영화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의 이 작품이 전시 전반에 영감을 이끌었다.

샘바이펜 작가는 디자이너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패션디자이너를 꿈꿨다.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미국 뉴욕 파슨스 스쿨에 입학했지만 이내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판단에 중퇴하고 만다. 하지만 빈 손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뉴욕 타임스스퀘어 광고와 사회주의 이미지의 유사성을 발견한 그는 ‘나만의 것’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패러디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2015년 그의 첫 작업 소재가 된 것은 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쉐린의 캐릭터였다.

SAMBYPEN, HESITATE, 2025, Acrylic on wood and canvas, 193.9 x 130.3 cm (120F), Courtesy of artist & PKM Gallery.

SAMBYPEN, HESITATE, 2025, Acrylic on wood and canvas, 193.9 x 130.3 cm (120F), Courtesy of artist & PKM Gallery.

양날의 검된 콜라보레이션

작가는 포켓몬스터와 스펀지밥, 심슨 가족, 호빵맨 등 익숙한 캐릭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유쾌하게 풀어냈다. 친숙한 서사와 캐릭터 작업으로 대중의 관심을 얻은 그는 이를 바탕으로 유수의 브랜드와 많은 협업을 진행했다. 스마트폰 액세서리 브랜드 케이스티파이부터 아모레퍼시픽, NBA, 원 소주, 시세이도, 모나미, GS리테일, 포르쉐, 나이키 등 그 분야와 협업의 형태도 매우 다양하다.

SAMBYPEN, SHOCK, 2025, Acrylic on wood and canvas, 227.3 x 145.5 cm (150P), Courtesy of artist & PKM Gallery.

SAMBYPEN, SHOCK, 2025, Acrylic on wood and canvas, 227.3 x 145.5 cm (150P), Courtesy of artist & PKM Gallery.

브랜드 협업을 통해 탄탄히 입지를 다져가던 그는 돌연 슬럼프를 겪게 된다. 작가로서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도와준 브랜드 협업이 어느새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름길을 택했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질 않았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솔직하고 담담하게 당시를 회상했다. “물밀듯 들어오는 브랜드 협업을 모두 해내다 어느 날 SNS에 올라온 제 작업물을 봤는데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이후 과감하게 상업 활동을 모두 중단하고 작업에만 매진하기로 결심했죠.”

이날 자리에 함께한 박경미 PKM 대표는 샘바이펜을 “엉덩이가 무척 무거운 작가”라고 표현하며 작가의 성실함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작가의 가능성을 가늠할 때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가’와 ‘지구력 있게 자신의 재능을 끌고 나가는가’ 두 가지로 판단하는데, 샘바이펜 작가에게서는 두 가지 모두 엿봤다”고 말했다.

SAMBYPEN, CROWD, 2025, Acrylic on wood and canvas, 97 x 193.9 cm (120M),Courtesy of artist & PKM Gallery.

SAMBYPEN, CROWD, 2025, Acrylic on wood and canvas, 97 x 193.9 cm (120M),Courtesy of artist & PKM Gallery.

‘시한폭탄맨’ 속에 비친 우리의 초상

‘시한폭탄맨’은 묵묵히 쌓아 올린 시간 덕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작가 자신을 투영해 만든 이 캐릭터는 4년 전 개최한 개인전에 처음 등장했다. 작가는 당시에 ‘사과 박스에 현금이 얼마나 들어가나’를 주제로 한 뇌물 관련 내용의 뉴스를 보고 사과 모양을 한 빨간색 폭탄을 그렸다. 그는 “사과 박스가 지닌 상징성을 캐릭터화하면 귀엽게 어필하면서도 사회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불편하지 않게 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SAMBYPEN, DELUSION, 2025, Acrylic on wood and canvas, 116.8 x 91 cm (50F),Courtesy of artist & PKM Gallery.

SAMBYPEN, DELUSION, 2025, Acrylic on wood and canvas, 116.8 x 91 cm (50F),Courtesy of artist & PKM Gallery.

이번 전시에서는 더 다양한 시한폭탄맨을 만나볼 수 있다. 샘바이펜의 ‘시한폭탄맨’ 아이콘은 해야만 하는 일들을 나중으로 미룰 때 생겨나는 마음의 동요, 두려움, 무기력함 등을 상징한다. 폭발하거나 김을 내뿜고, 소진된 모습으로 에드워드 호퍼나 에두아르 마네의 명화가 연상되는 작품 속에서 원래 그곳에 있었던 양 천연덕스럽게 등장한다. “누구나 다 회사에 가기 싫고,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일들이 있잖아요. 저는 특히 게으른 사람인데 막상 게으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더라고요. 시한폭탄맨을 보면서 ‘게으름’의 심리에 주목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되는 작가의 'WALL' 시리즈. /PKM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되는 작가의 'WALL' 시리즈. /PKM

SAMBYPEN, Soldier Wall, 2025, Mixed media on canvas, 227.3 x 181.8 cm (150F), Courtesy of artist & PKM Gallery.

SAMBYPEN, Soldier Wall, 2025, Mixed media on canvas, 227.3 x 181.8 cm (150F), Courtesy of artist & PKM Gallery.

작가의 이번 개인전에는 두 가지 시리즈가 공개된다. 펜 드로잉과 컴퓨터 그래픽스, CNC 가공, 물감칠을 거쳐 탄생한 그의 대표작 입체적 페인팅 시리즈와 더불어 그래피티에서 발전시킨 ‘Wall’ 시리즈가 관객 앞에 첫선을 보인다. 이 시리즈의 작품에는 ‘FAKE’라는 단어가 풍선껌 판박이처럼 여기저기 붙어 있다. 마치 “예술에 진짜, 가짜가 어딨어!”라며 소리치는 작가의 고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Andy Warhol)은 DC 코믹스의 슈퍼맨을 오마주했고,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은 만화책의 장면을 모티브로 작품을 만들었다. 한때 누군가는 이를 두고 “영혼 없는 패러디”, “진짜 예술이 아니다”라며 비난했지만, 결국 이들은 이 익숙한 것들로 예술의 정의를 다시 써 내려갔다. 샘바이펜의 고함에도 새로운 밀물을 향한 그의 바람이 스며있는 듯하다. 전시는 5월 17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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