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선관주의·충실의무 위반 첫 조정결정
고객별 손해액 60~70% 배상
금융감독원 금융분쟁조정위원회가 채권형 랩 상품을 운용하면서 기업어음(CP)과 채권을 시장가격보다 비싸게 사들이고, 상품 만기와 맞지 않는 장기 채권을 편입해 손실을 낸 증권사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자본시장법상 투자일임업자의 선관주의·충실의무 위반 여부를 분조위가 판단한 첫 조정결정이다.
금감원은 30일 전날 열린 분조위에서 한 증권사가 고객의 채권형 랩 계좌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선관주의·충실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하고, 고객별 손해액의 60~70%를 배상하도록 결정했다고 밝혔다.
채권형 랩은 증권사가 고객과 1대1 투자일임계약을 맺고 자산을 운용하는 상품이다. 법인 고객의 단기자금 운용 수단으로 주로 활용됐지만, 2022년 하반기 레고랜드 사태 이후 시중금리가 급등하면서 채권·CP 가격이 급락하자 손실과 환매 지연 문제가 불거졌다.
분조위는 해당 증권사가 고객 자산으로 CP·채권을 민평금리보다 낮은 금리, 즉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매수한 행위를 문제로 봤다. 랩 상품 만기가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잔존만기 약 10개월의 채권·CP를 편입한 뒤 시장 상황 변화에 대비한 리스크 관리도 소홀히 했다고 판단했다.
고가매수 거래의 상당수는 다른 고객의 목표수익률을 맞춰주기 위한 이른바 ‘제3자 이익도모’ 목적에서 이뤄진 정황도 금감원 검사에서 확인됐다. 분조위는 해당 증권사가 과거 신탁재산 상호간 거래 금지 위반으로 제재를 받은 뒤에도 유사한 위법 운용이 재발하지 않도록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봤다.
분조위는 고객 A에게 손해액의 70%인 12억6000만원, 고객 B에게 손해액의 60%인 3억9000만원을 각각 배상하도록 결정했다. 손해액은 가입 당시 제시된 목표수익률 기준으로 만기에 받을 수 있었던 원리금과 실제 상환액의 차이, 실제 상환 시점까지의 지연손해금 등을 반영해 산정했다.
A는 2023년 채권형 랩 2건에 총 800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증권사는 1차 상품 만기 하루 전 내부감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환매를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A는 이후 원금보다 4억6000만원 적은 795억4000만원을 상환받았다.
B는 같은 해 두 차례에 걸쳐 150억원을 투자했다가 약 4억5000만원의 평가손실이 발생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후 거래내역을 확인해 CP 고가매입과 만기미스매칭 운용 사실을 파악하고 운용중단을 지시했다. 다만 당시 CP 가격 하락으로 환매가 어려워 편입 CP의 만기까지 보유한 뒤 150억3000만원을 상환받았다.
이번 결정은 채권형 랩·신탁 운용을 둘러싼 금융당국 제재의 연장선에 있다. 금융위원회와 금감원은 지난해 2월 채권형 랩·신탁 관련 자본시장법 위반을 이유로 9개 증권사에 기관경고 8건, 기관주의 1건과 총 289억7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한 바 있다.
금감원은 이번 조정결정이 위법한 고객 자산 운용에 대해 행정제재뿐 아니라 민사상 손해배상책임도 발생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조정안은 신청인과 증권사가 제시일로부터 20일 이내 수락하면 성립하며, 재판상 화해와 같은 효력을 갖는다.
금감원은 “증권사의 채권 거래 과정에서 적절한 가격 산정 등 건전한 채권 운용 관행이 정착되도록 유도하겠다”며 “분쟁조정 제도를 적극 활용해 소비자 권익 보호를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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